오월 초엿새, 시침한 뒤 처음으로 미앙궁에 간 날이었다.
그전에는 황후 마마께서 아침부터 말씀을 전해오셨다. 나는 나이도 어리고 고생스러울 테니 문안을 올리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황후 마마가 그리웠고, 가서 만나 뵙고 싶었다. 황후 마마께서 나를 황상의 눈에 며칠 들었다고 기고만장해서 불경을 저지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게 하고 싶지 않았다. 황후 마마께서 나를 벌할까 봐 두려운 게 아니다. 그러실 분도 아니지만. 그냥 그분이 상심할 게 겁나서다.
숙비 마마는 정향색의 오래된 옷을 입어 자신의 아름다운 눈이 드러나지 않게 억눌렀다. 나도 평범한 옷을 입었다. 우리는 가는 길 내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악물고 무슨 말을 듣든 반응하지 마. 진채용이 사람들 앞에서 방귀 뀐다고 생각해.”
진 귀비의 방귀는 길고도 추했다. 내가 미앙궁에 들어설 때부터 빈정대고 욕을 하더니, 두어 마디 만에 잔소리가 교훈으로 변했다. 나는 온 소의 아랫자리에 앉아 메추라기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이전에 가장 총애를 받던 정 숙의는 원래 진 귀비와 물과 불처럼 사이가 나빴는데, 오늘은 어째 끝도 없이 장단을 맞췄다.
나는 “마마의 가르침을 새겨듣겠습니다.”라고 한 뒤로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 귀비는 화가 가라앉지 않아, 탁자를 두드려대며 내가 염치없이 요망을 떤다고 욕했다.
그렇지만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후 마마에게 가로막혔다.
황후 마마의 어두운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황후 마마는 여리고 부드러운 모습을 거두고는, 정색하고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렇게 눈빛만으로도 장내를 쥐 죽은 듯 조용하게 만드셨다.
“귀비는 입궁한 지 사 년이나 되었는데 어찌 아직도 규율을 익히지 못했나?”
평소에 황후 마마의 눈가에는 언제나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진 귀비가 아무리 난리를 쳐도 물정 모르는 아이 보듯 하며 훈계하셨다. 그런데 지금은 눈을 바꿔 끼신 것 같았다. 산꼭대기의 만년 한설처럼 싸늘한 눈빛은 진 귀비가 입을 다물게 하기에 충분했다.
황후 마마께서 너무 오랫동안 화를 내지 않으셨나 보다. 미앙궁 전체가 잠잠해졌고, 황후 마마는 고개를 들고 한번 훑어보신 뒤 가볍게 웃으셨다. “완첩여가 황상의 시중을 드느라 고생하였으니 상을 내리겠다.”
진 귀비는 궁에 들어온 이래 이렇게 체면을 구긴 일이 없었는지,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렸다. 두 번쯤 입을 열었다가도 금세 다물어 버렸고, 창피함에 눈시울도 붉혔다. 그녀는 중앙에 서서 황후를 매섭게 노려보았지만, 황후 마마 역시 요지부동으로 그녀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이 대치를 깨뜨린 것은 한 장의 조서였다. 황상이 내 지위를 높여 완수의(婉修仪)로 봉한 것이다. 진 귀비는 결국 참지 못하고 비취 팔찌를 내던지고는 입을 가리고 흐느꼈다. 결국 인사도 올리지 않고 나가버렸다. 아까운 팔찌…… 차라리 날 주지! 마음이 아파 죽을 것 같았다.
나는 숙비, 온 소의와 함께 미앙궁에 남았다. 황후 마마는 원래의 눈빛으로 돌아와, 무서워하지 말라고 부드럽게 위로해 주시며, 황상이 내게 잘 대해주었는지, 황상이 좋은지도 물으셨다. 평소에 황상의 시중을 들 때는 너무 긴장하지 말고 본분을 지키며 제멋대로 굴지만 않으면 된다고도 하셨다.
나는 황후 마마의 무릎 위에 엎드려 속삭였다. “마마, 황상이 제게 봉구황을 들려달라고 했어요.”
황후 마마는 내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그럼 소류아가 잘 타드리렴.
나는 또 말했다. 황상이 장간 마을에 함께 살던 우리는 허물없는 어린아이였다고도 썼어요.
황후 마마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류아, 너는 참 착한 아이야.
나는 황후 마마께서 계속 말씀하시길 기다렸다. 황후 마마께서 더 말씀해주시길 바랐다. 하지만 그분은 나를 토닥이며 대추떡을 먹으라고 하셨다. 나는 떡을 먹으면서 황후 마마가 예전엔 어떤 모습이었을까 생각했다. 저토록 아름다우시고, 또 저토록 쓸쓸하시다. 분명 눈앞에 계신데, 왠지 흐릿하고 멀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께서 가르쳐주신 시 두 구절이 떠올랐다. ‘산 위의 눈처럼 희고 구름 사이 달처럼 밝다.’ 나는 황후 마마가 나처럼 떡을 먹고 입가에 부스러기를 묻히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려 했지만, 상상이 완성되기도 전에 나를 때려죽이고 싶어졌다.
우리는 그날 미앙궁에 오래 머물면서 황후 마마, 숙비, 온 소의가 지난 일을 회상하는 것을 들었다. 황후 마마와 숙비는 동궁 시절부터 함께한 옛 친구였다. 그 시절 총애받던 허 양제(许良娣*)는 작년에 냉궁에서 죽었다고 했다.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현비와 삼황자를 낳은, 건강이 좋지 않아 거의 외출하지 않는 순비가 동궁에서부터 함께 지냈다고 한다. 온 소의는 자신과 진 귀비, 정 숙의 모두 황상이 등극하고 첫 수녀 선발에서 간택되었다고 했다. 그 해에 총 스물여덟 명이 입궁했고 지금은 열아홉 명만 남았다고 한다. 그중 열 명은 삼 년 동안 황상을 몇 번 만나지도 못했다고 한다…….
*태자 후궁 직위 중 하나
마지막으로 숙비 마마가 한숨을 쉬며 말씀했다. “소류아, 무서워하지 마. 우리가 어떻게든 널 지켜줄 테니까. ——네 머리가 맑은 한. 네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한.”
온 소의도 말씀하셨다. “소류아, 사내들은 여인이 남자에게만 의지할 수 있다 여기고, 여인은 다른 여인을 못살게 굴길 좋아한다고 하지. 네가 이런 멍청한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사내에게 속아 넘어가도 싸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 마마는 나지막이 흐느끼며 숙비 마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황후 마마의 수척한 뺨에 눈물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나는 이 눈물의 이유를 묻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동안 황상은 나를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생각이 나면 선물을 보냈다. 어떤 때는 장신구였고, 어떤 때는 장식품이었다. 날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흰 토끼 한 쌍이었다. 숙비 마마는 이전에 나와 삼공주에게, 궁 밖에 홍운루라는 유명한 주루가 있는데, 그곳에는 토란과 토끼를 홍소 방식으로 만든 맵고도 맛있는 요리가 있다고 이야기하신 적이 있다.
하사받은 토끼를 보고 있자니 살아 움직이는 토란토끼 요리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숙비 마마의 머리는 멀쩡하시다. 문만 닫으면 매일 황상을 욕하지만, 문을 열고는 ‘겁쟁이怂’를 온몸에 써 붙이고 계신 것처럼 구셨고 하사품인 토끼를 요리할 지경으로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나와 삼공주는 무척 괴로워하며 매일 어떻게 하면 토끼를 의외의 사고로 죽게 만들 수 있을까에 주력했다.
요 며칠 황상은 진 귀비에게 갔다가 정 숙의에게 갔다가 순비도 찾았다가 청미인을 불러다 청첩여로 승진시키기도 했다. 아무튼 무척 공평했다.
숙비 마마는 그를 깔보며 욕했다. “황상이야말로 온 천하에서 제일 더러운 사내일 거다.”
그렇게 말씀하실 때 나는 토끼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상심할까 싶으셨던지 얼른 말을 덧붙이셨다. “소류아, 마음 아파하지 말고, 바보 같은 짓도 하지 말렴. 황제놈은 원래 이런 작자야. 그놈이 널 총애하면 그 총애를 받고, 그놈이 선물을 보내면 받아두면 돼. 하지만 그놈이 널 좋아한다고 말하면 절대로 믿으면 안 돼! 소류아……, 설마 토끼를 보고 그놈이 그리워진 건 아니겠지? 응?”
“…… 마마, 제가 토끼를 창밖으로 던지면 죽을까요? 토끼가 죽으면 토란토끼를 만들 수 있을까요? 맛에 영향을 줄까요?”
“…… 가서 도덕경 열 번 베껴 써. 다 못 끝내면 밥은 없을 줄 알아.”
오월 십육일 아침, 하늘이 아직 잿빛이고 내가 잠에 푹 빠져 있을 때, 숙비 마마께서 내 이불을 들추시더니 손가락을 내 입술에 가져다 대며 말씀하셨다. “소류아, 얼른 일어나렴. 황상이 또 발작했나 봐.”
나는 눈을 비비며 이불을 껴안고 더 자고 싶다고 낑낑거렸는데, 숙비 마마께서 화가 나 내 뒤통수를 때리셨다. “낑낑거리지 말고 얼른! 요요한테 일이 터졌단 말이야!”
나는 당장 이불을 들추고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어제는 보름이라 황상은 미앙궁의 황후 마마에게 가야 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황상은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화가 나서 문을 쾅 열어젖히고는 미앙궁에서 나왔단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곁에 있던 두 궁인을 꾸짖었다는 건지, 궁문 앞에서 때렸다는 건지, 아무튼 마지막에는 황후 마마께서 사람을 보내 무슨 말을 전했고, 그를 들은 황상은 미앙궁 궁문을 손가락질하며 한참 동안 말문이 막힌 채 서 있다가 ‘급히 달려온’ 귀비 마마에게 이끌려 경명궁(景明宫)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나는 깜짝 놀라서 숙비 마마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황상이 미앙궁으로 돌아가서 황후 마마를 때리지는 않겠죠?” 숙비 마마가 어깨를 으쓱이며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놈도 자업자득이지, 흥!”
우리는 한참 앉아 있다가 오늘은 문안 올 필요 없다는 미앙궁의 전언을 받았다. 그리고 황상이 성지를 내렸다. 진 귀비를 황귀비로 봉하여 부후(副后)와 같게 하고, 육궁을 다스리는 것을 보좌한다는 것이다. 또한 황후의 봉체(凤体)가 미령하니, 봉인(凤印)을 잠시 황귀비가 맡고 궁중 사무도 황귀비가 관리하며 현비와 순비가 보좌한다고 했다.
나는 걱정에 발을 동동 구르다가, 미앙궁으로 가서 황후 마마 곁에 있겠다며 삼공주와 함께 떼를 썼다. 숙비께서 우리를 데리고 가려던 중에 황귀비가 떠들썩하게 이화궁에 당도했다. 기쁜 일을 맞아 기분이 상쾌한지, 주홍빛 옷을 입고 진주와 비취로 머리를 꾸민 그녀는 턱을 들고 눈을 까뒤집었다. 안하무인으로 날뛰는 모습은 황귀비가 아니라 아들을 즉위시킨 태후 같았다.
우리는 거친 청석판 위에 무릎을 꿇었다. 황귀비는 온 얼굴에 ‘복수하러 왔다’고 써 붙이고선 색을 칠한 손톱을 살펴보며 나와 숙비가 평소에 얼마나 불경했는지 읊었다. 그리고 벌로 무릎 꿇고 경서를 베껴 쓰게 했다. 게다가 삼공주는 이화궁에서 뚱뚱하고 버릇없이 키운 데다, 황후 마마께서 편찮으신지라 단속하지 못하셨으니 황귀비로서 두고 볼 수 없다며, 어렵겠지만 교양을 쌓게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어멈과 궁녀들이 달려들어 공주를 뺏어가려 하느라 혼란이 벌어졌다. 진 귀비의 측근 대궁녀는 내 앞에서 토끼들을 이화궁의 가산(假山)으로 내던져 죽여 버렸다. 내가 삼공주의 눈을 가릴 겨를도 없었다. 숙비는 우리를 품에 단단히 안고서 무릎을 꿇은 채 황귀비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황귀비 마마, 첩신은 마마께서 무한한 복과 장수를 누리시길 바랄 뿐입니다.”
황귀비가 데려온 어멈이 숙비 마마를 세게 밀어냈다. 하지만 가락은 숙비 마마 슬하에서 공처럼 통통하게 살이 찐 터라 안고 가기 어려웠다. 그 어멈은 허리를 삐끗할 뻔했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가락에게 깨물렸다. 나도 이판사판으로 삼공주를 꼭 껴안은 채, 그들이 내 팔을 때려도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고는 온 소의가 황후 마마를 모시고 왔다. 황후 마마는 심하게 기침하면서 안색도 창백한 모습으로 우리를 당신 뒤에 가리셨다. 그리고 황귀비는 사적인 원한으로 궁비를 상하게 하지 말며, 어린 공주를 놀라게 하는 것은 더욱 안 될 일이라 하셨다. 나는 숨을 헐떡이는 황후 마마의 모습을 보면서 처음으로 그분의 뒷모습이 이렇게 외롭고 여위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황후 마마는 우리를 위해 비바람을 막아줄 수 있을 만큼 높이 솟은 거대한 나무처럼 곧게 서 계셨다.
하지만 황귀비는 이제 황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 방자하게 소리쳤다. “이 궁의 하늘은 이미 뒤집혔어! 심운요(沈云瑶), 네가 누굴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황후 마마 앞으로 다가왔다. 무릎을 꿇고 있던 숙비 마마가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황후 마마 앞을 가로막았다. 황귀비는 상관하지 않았다. 내리 깐 목소리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득의가 묻어났다. “심운요, 무고한 척은 그만 해. 그래, 난 일부러 널 번거롭게 만든 거야. 두고 봐,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이렇게 날뛰는 비빈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혼란의 소용돌이에 황상이 느지막이 당도했다.
숙비 마마는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틈에 내 비녀를 뽑았다. 허리까지 오는 삼 척의 기다란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공주를 껴안고 있는 내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황귀비는 돌아서서 황상을 잡아당기며 애교를 부렸다. 우리가 얼마나 불경한지, 삼공주가 얼마나 버릇없이 컸는지, 황후 마마가 얼마나 자신을 억압했는지 고자질했다.
평소에 그녀의 눈은 이마 꼭대기에 달려 있고, 어투는 무게감이 가득했는데, 지금 그녀는 목소리를 높여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는 마술이라도 본 것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황후 마마는, 황후 마마는 꼿꼿이 허리를 세운 채 꿇어앉아서 황상을 쳐다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휴! 사람은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고생하게 되어 있는 법이다!
황상은 황후 마마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한평생이 흘러갈 만큼 오랫동안 서로를 마주 보았다. 황상의 안색은 점점 나빠졌고, 결국에는 철저히 패배하여 아무 논리도 없이 황후 마마가 후궁을 단속하지 못한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와 삼공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리는 황상 앞으로 달려가 꿇어앉았다. 나는 부어오른 팔을 그에게 보여주며, 황후 마마께서 구해주지 않으셨더라면 내 손은 부러졌을 거라고 말했다.
이 일의 결론은, 숙비는 가르침에 미력했으니 반년간 봉급을 삭감하고, 황후는 후궁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으니 반년간 미앙궁에서 금족하는 것이었다. 삼공주는…… 황상은 삼공주를 언급하며 나를 한번 보았다. 나는 온 얼굴 가득한 눈물과 풀어헤친 머리카락을 다듬을 새도 없이 가락을 품에 꼭 껴안고 있었다. 황상의 어투가 누그러지며, 삼공주는 이화궁에서 계속 양육하되 잘 가르치지 못하면 다른 곳으로 보낼 것이며, 완수의는 억울하게 고생했으니 금은 장신구를 하사하겠다고 했다.
말썽을 일으키러 온 황귀비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
이렇게 편파적으로 일을 처리하니 황후 마마, 숙비 마마, 온 소의 모두 황상을 싫어하는 것이다.
나도 그가 싫었다.
다들 떠나고 나자 숙비 마마는 우리 둘을 껴안고선 우리를 헛되이 아낀 게 아니라며, 황후 마마를 보호할 줄 아는 착한 아이라고 하셨다.
당신도 이마가 한껏 부어올랐지만, 숙비는 스스로를 전혀 돌보지 않고 태의에게 내 팔을 살피도록 하셨다. 태의가 약을 바르는 동안 나는 아파서 울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의 무시무시한 상황에서도 울지 않았는데 이제야 목이 쉬도록 통곡을 했다. 숙비 마마는 삼공주를 토닥이듯 나를 토닥이시며 “오오, 그래그래”하고 아기 달래듯 달래셨다. 나는 숙비 마마께 알려주고 싶었다. 마마, 손이 아파서 우는 게 아니에요. 제가 우는 건——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황상이 사람은 괜찮다고 생각해서예요!
전 정말 멍청해요! 어쩜 이렇게 멍청할까요! 제가 너무 멍청해서 우는 거예요!
그날 저녁 황상은 황귀비의 처소에 머물렀다. 숙비 마마는 삼공주를 달래 재우시곤 나와 한 침상에 누우셨다. 숙비 마마는 즐거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소류아, 그거 아니? 진채용은 이제 끝장이야. 걔한텐 이제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소류아, 사실 진채용은 나쁜 게 아니야. 걔가 오늘 저지른 멍청한 짓을 보렴. 얼마나 멍청하니. 당당한 호국공의 적녀를 그렇게 멍청하게 길러서 궁에 들여보냈으니, 진가 만문이 몰수당해도 싸지. 진채용 이 바보는 입궁한 지 사 년이 되도록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했어. 걔가 오늘 요요한테 하는 말을 듣고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지 뭐니. 흥! 누가 뭐라고 하면 그대로 믿어버리는 멍청이 주제에 제가 하늘을 대신해 정의 구현이라도 하는 줄 안다!”
“다 옛날 일이니 말할 것도 없긴 하다만, 걔가 얼마나 멍청한지 좀 보렴. 사 년 동안 시침을 그렇게 많이 들었는데 아이가 하나도 없지. 게다가 오늘은 내 가락까지 뺏으러 왔어. 자기한테 왜 아이가 없는지는 생각을 안 해보는 건가?”
“왜냐하면, 황상은 진채용의 아이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야.”
“내 아버지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将军)이시단다. 그러니 나는 딸밖에 둘 수 없는 거야. 내가 사내애를 낳았다면 그 아이는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다행히도 가락은 딸이었지. 하늘이 도우셨어.”
“똑똑하네, 이런 질문도 다 하고.”
“당연히 삼황자를 건드릴 생각은 못 하지. 순비는 황상의 사촌 누이란 말이야! 나보다 체면도 있으니 당연히 나만큼 만만하지 않지. 게다가 궁중의 누가 나와 요요의 사이가 좋다는 걸 모르니? 걘 황후가 될 꿈에 젖은 지 오래라고. 대놓고 미앙궁에 가서 일을 벌일 수는 없으니, 우리한테 흙탕물을 뿌릴 수밖에. 흥! 진가는 사람들이 전부 글렀어!”
“온 소의 말이니? 걘 아들을 낳을 수 있어. 아버지가 호부상서인데, 황상의 심복이야. 그런데 온원원(温媛媛)은 황상을 거들떠보지도 않잖아. 아니지, 온원원은 아무도 안 좋아해. 자수만 좋아하지. 고금 제일의 자수 장인이 될 생각뿐이고, 시집가서 아이 낳고 사는 덴 아무 관심도 없었어. 황상은 그 애의 솜씨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데다가 바람기까지 다분하니 온원원은 그 얼굴에 침이나 뱉어주고 싶어 해.”
“황후 마마? 소류아, 순비에게 삼황자가 있고 내게는 삼공주가 있잖아. 그런데 궁에 다른 아이들은 없지? 원래 황후 마마께 아이 셋이 있었어. 전부 하늘로 가버렸지만.”
“그리고 다른 하나? 이공주의 생모는 허 양제야. 후에 허 덕비(许德妃)와 함께 냉궁으로 쫓겨났는데 풍한을 이겨내지 못했다.”
“허 덕비 말이지……. 소류아, 네가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해 다행이다. 그야말로 사람을 집어삼키고 뼈도 뱉어내지 않을 독한 사람이었어. 넌 모르지. 그 두 해 동안 우리는 정말로 온갖 고생을 다 했단다. 황후 마마의 막내아들도 지켜내지 못했어……. 두 살이던 장안(长安)이 천연두에 걸렸을 때, 난 온원원에게 가락을 던져놓고 내 손으로 장안을 돌봤어. 난 천연두를 앓은 적이 있었거든. 불쌍한 장안, 정신이 흐릿해질 정도로 열이 올랐는데. 마지막에는 내 눈물까지 닦아주며 나더러 ‘모후, 울지 마세요’ 그러더라. 아휴, 아휴……. 황후 마마는 기절할 때까지 우셨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니! 울어도 아이가 살아 돌아올 순 없는데! 그런데 일 년쯤 지나자마자 황상은 또 수녀를 들였어. 소류아, 그때야말로 온갖 고난이 몰아치던 때란다. 진채용은 기껏해야 사람 귀찮게 하는 정도지, 허 덕비는 우릴 죽이려 들었어……. 황상은 우리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도 않았고!”
나는 이야기를 듣다가 졸음이 몰려왔다. 숙비 마마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셨다. 숙비 마마가 날 토닥였던 것처럼 나도 손을 뻗어 그녀를 토닥이며 말했다. 마마, 울지 마세요. 인제 그만 주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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