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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장류 宫墙柳

제5장 달이 기울다 月落

by 小曜 2023. 7. 19.

 

 

우리는 황후 마마를 막을 수 없었다. 황후 마마는 쏟아지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영안궁으로 가셨다. 나와 숙비 마마도 따라가려고 했지만, 자수 애호가 온 소의께서 단호하게 말리셨다. “아유, 갑자기 머리에 물이라도 찼어? 그 자식이 널 못마땅하게 보는 거 몰라? 됐으니까 소류아나 데리고 돌아가. 내가 따라가 볼게.”

 

우리는 먼저 이화궁으로 돌아왔다. 나는 숙비 마마께 황상이 왜 마마를 못마땅하게 보냐고 여쭈었다. 숙비 마마는 득의양양하게 다리를 떨며 말씀하셨다. “그 자식이 내 앞에서 가증스럽게 연기하다가 나한테 들통났거든. 하하하하하하. 막 즉위했을 때였어. 대공주가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때 수녀 선발을 시작했지. 내 앞에서 질질 짜면서 저 대신 요요를 돌봐주어 고맙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침을 뱉으면서, 내가 절 위해 요요를 돌보는 줄 아느냐고, 내가 요요랑 사이좋은 게 저랑 무슨 상관이냐고, 대공주의 생사는 관심도 없지 않으냐고 그랬어. 정말 통쾌했지. 그 망할 자식은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겠지만. 하하하하하하하하.”

 

숙비 마마는 정말 즐거운 듯 몸을 흔들어가며 웃으셨다. 나는 어쩜 그렇게 담이 크시냐고 여쭈었다.

 

“우리 주가(周家)는 여섯 대에 걸친 충신 집안이야. 황제를 대신해 요서를 지키느라 위아래로 얼마나 많은 아들들이 죽었게? 우리 아버지는 사형제이신데 지금은 아버지와 셋째 숙부만 남았어. 내 오라버니 다섯 중에서는 둘이 죽었고……. 내가 화를 자초하지만 않으면 저 자식도 날 곱게 살려둬야 할 거야. 실언이었을 뿐이니 벌로 석 달 녹봉을 깎고 넘어갔지. ——저 자식은 원래 날 안 좋아했어. 지금은 아예 못 본 셈하고 사는 거지. 별거 아냐. 내 부형(父兄)을 계속 쓰기 위해 내게 높은 지위를 주어 위로를 표해야 하고, 내 부형을 방비하기 위해 나를 너무 총애해서도 안 되고 내가 아들을 낳지 못하게도 해야 하는 거야. 그들이 다른 마음을 먹지 않도록. 지금 난 사비(四妃) 중에서도 제일 그림자처럼 살고 있으니 황제놈도 만족하겠지.”

 

숙비 마마는 살구씨로 만든 과자를 입에 넣으시곤 내 입에도 하나 물려 주셨다. 과자가 너무 커서 씹기 힘들었다. 숙비 마마는 나를 안고 웃으며 말씀하셨다. “소류아, 볼이 볼록하니까 정말 다람쥐 닮았다.”

 

난 흰자위를 뒤집으며 과자를 목뒤로 넘기고 말했다. “황후 마마께서 비에 젖으면 어떡해요? 황상이 황후 마마를 괴롭히진 않을까요?”

 

숙비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괜찮아. 오늘 밤엔 별일 없을 거다. 요요는 정말 바보란다. 예전엔 너랑 똑같았어. 바보 같고, 먹는 거 좋아하고, 노는 거 좋아하고, 늘 눈가를 휘며 웃고 다녔지. 그때 난 요서에서 막 동궁으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태자비를 만났는데, 처음 만나자마자 요요는 내게 해바라기 씨를 줬어. 우린 몰래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허 양제에게 고자질 당하기도 했지. 그때 황후는, 그러니까 나중에 죽은 인화태후(仁和太后)는 허 양제의 고모였거든. 얼마나 못된 할망구였는지 아니! 우린 같이 책 베껴 쓰는 벌을 받았어. 한밤중에 황상—— 그 시절엔 태자였지. 아무튼 그 자식이 창문을 넘어 들어오더니 요요에게 사과하지 뭐야. 요요가 그 자식을 상대하지 않으니까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는 요요의 소맷자락을 흔들면서 빌더라. 아이고, 그땐 몰래 부러워하기도 했는데! 그런데 그 뒤에……”

 

숙비 마마의 목소리가 점점 약해지며 흐릿한 울음소리가 섞였다. “그 뒤에 요요가 아들딸 쌍둥이를 낳았어. 딸은 장락(长乐)이라 하고, 아들은 장평(长平)이라 했지. 그렇게 사흘이나 기뻐했을까? 인화태후와 허 양제가 내 품에서 장평을 뺏어가 버린 거야! 그것도 내 품에서! 난 죽자 살자 싸웠지만……. 요요를 볼 면목이 없어…… 너무 미안해서……. 난 태자에게도 가서 한참 동안 무릎을 꿇고 빌었어. 내 무릎의 고질병은 그때 든 거야. 하지만 그땐 허씨 일가가 조정을 장악하던 시절이라……. 석 달 뒤에 허 양제도 회임했지. 우린 작은 장평을 데려올 수 있을 거라며 기뻐했지만, 장평이 죽었어……. 그쪽에선 조왕비(赵王妃)가 질식시켜 죽였다고 했는데……. 아아, 소류아, 넌 모르지. 나와 요요의 눈물샘은 그때 다 말라버릴 뻔했단다……. 우리 모두 조왕비의 짓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니! 그때 태자는 허가가 필요했고, 조왕을 무너뜨리고자 했었어. 그래서 그렇게 된 거야. 조왕은 좌천되어 황릉을 지키게 되었고, 허 양제는 딸을 낳았고, 요요는 장평을 잃었고……. 장락이 없었더라면 그때 요요의 병은 아마 낫기 어려웠을 거야…….”

 

숙비 마마가 고개를 약간 젖혔다. 나는 마마의 어깨에 기댔다. 마마의 몸이 살짝 떨렸고, 목소리는 공허했다. “허선방(许婵芳)의 딸은 동궁에서 가장 득의양양했지. 어린 나이에도 얼마나 난폭하던지, 두세 살 먹은 어린애가 태자가 장락을 안는 것만 봐도 천지가 뒤집힐 정도로 난리를 피우더라……. 가락은 그 애보다 두 살 어렸는데, 가락의 친아비는 저한테 이런 딸이 있는 것조차 기억을 못 했어. 난 이대로도 괜찮다고, 가락이 장락과 함께 자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두 자매는 사이가 좋아서 늘 얌전하게 나란히 앉아 인형을 가지고 놀았지……. 그러다 장락도 죽었어. 허 덕비의 딸이 장락을 어화원의 호수에 밀어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촛불이 흔들렸다. 창밖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것이 마치 부서져 흩어진 봉구황처럼 들렸다.

 

구월 십육일, 호국공 진씨 만문이 몰수당하고 삼족이 절멸했다. 황귀비 진씨는 어녀로 폄적되어 재사궁(再思宫)으로 옮겨졌다.

 

황후 마마는 어젯밤에 풍한이 들어, 기침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셨다. 아침 일찍 미앙궁에 갔을 때 우리는 황상이 약그릇을 들고 고개를 숙인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황후 마마는 황상을 보지도 않으시며 평소 우리를 대하시던 것과는 다르게 냉담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황상은 국사를 돌보러 가십시오.”

 

황상이 일어나라고 하지 않아서 우리 모두 눈을 내리깔고 꿇어앉아 있었다. 무릎이 불편해서 황상이 빨리 가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몰래 눈을 들어 보니, 황상은 나갈 뜻이 전혀 없고, 그곳에 말뚝처럼 박힌 채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 약을 마시니 좀 괜찮소?”

 

황후 마마는 태산처럼 꿋꿋하셨다. “국사가 중요하지요. 첩의 몸은 태의가 알아서 처방을 내릴 테니 황상께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목소리가 듣기 좋으면서도 쓸쓸했다.

 

황상은 한참을 꾸물대다 겨우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럼 짐은 저녁에 다시 살피러 오겠소.”

 

황상은 문을 나서며 바닥에 꿇어앉은 우리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우리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황상이 나가자마자 숙비 마마는 화가 나서 침상에 달려들어 황후 마마를 흔들어댔다. “네가 진채용을 살렸다면서? 어? 네가 황제놈한테 날 그렇게 오랫동안 괴롭혔던 진채용을 살려달라고 부탁했다면서?”

 

숙비 마마는 황후 마마의 어깨를 잡고 앞뒤로 흔들어댔다. 황후 마마는 숨이 막힐 정도로 웃으셨다. 나는 숙비 마마를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어휴, 어르신 좀 참으세요! 황후 마마는 편찮으시잖아요!”

 

황후 마마는 한참을 웃다가 성질이 난 숙비 마마를 달래셨다. “아유, 진채용은 나쁜 사람이 아니야.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잖아.” 황후 마마는 고개를 저으셨다. 눈살을 살짝 찌푸리는 모습도 무척 아름다웠다. “누군가 차례차례 그런 버릇을 들인 거지. 그녀는 속은 거야……. 널 괴롭힌 것도 진채용이 아니라…… 그 사람이야. 진채용도 나랑 마찬가지지. 토사호비*라잖아, 아유…….”

*兔死狐悲: 여우가 토끼의 죽음을 슬퍼함. 같은 신세인 남의 처지를 보고 슬퍼함. (네이버사전)

 

숙비 마마는 화가 나서 황후 마마를 꽉 껴안으며 옷을 다 구겨놓았다. “알겠어. 하지만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건 나여야 해! 나, 온원원, 소류아, 이렇게야 말로 네 친구라고! 진채용은 제일 뒤에 서라고 해!”

 

총애 다툼 한번 참 독특하다!

 

그 뒤로 이어진 일상은 퍽 즐거웠다. 황후 마마는 여전히 병중이시라 사무는 모두 현비 마마에게 맡겨졌다. 현비 마마는 감히 참월할 수 없어, 매일 처리한 일들을 황후 마마께 공손히 보고했다. 우리는 현비가 황후 마마 대신 이런 번잡한 일들을 더 맡아주길 바란 나머지, 매일 미사여구를 바꿔가며 일 잘하고 똑똑하고 사심이 없다고 칭찬했다. 숙비 마마는 그녀에게 간식도 만들어 주었다. 칭찬 폭격을 당한 현비 마마는 기꺼이 전력을 다했다.

 

진 귀비, 아니, 진 어녀는 이번 일을 겪으며 황후 마마의 가장 충성스러운 팬(死忠粉)이 되었다. 매일 제일 먼저 미앙궁에 가서 제일 늦게 궁문을 나섰다. 황후 마마의 머리를 빗기는 것부터 황후 마마를 침상에서 부축해 일으키는 것까지 전부 직접 시중들었다. 미앙궁의 장사고고는 매일 진 어녀에게 일거리를 빼앗긴 그늘 속에서 걱정하며 지내느라 머리가 셀 지경이었다.

 

숙비 마마: “감정이란 말이야, 선후가 있는 거라고. 동고동락하며 지낸 사이랑 중간에 끼어든 사이랑은 아무래도 다르지.”

 

진 어녀: “황후 마마, 제비집 드세요.”

 

숙비 마마: “참, 요요, 저번에 나랑 원원이랑 이야기할 때 해양등(蟹酿橙)*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게는 찬 성질이라 올해는 못 먹겠다. 내년에 네가 건강해지면 해줄게.”

*蟹酿橙: 귤껍질에 게살을 넣고 귤즙, 술, 식초 같은 걸 넣어서 찐 요리

 

진 어녀: “마마, 옷을 더 걸치시겠어요?”

 

격노한 숙비 마마는 매일 온 소의와 연합해 총애를 다퉜다. 진 어녀는 황후 마마의 머리를 빗기고, 온 소의는 황후 마마를 위해 새로 만든 금실로 구름을 수놓은 붉은 토끼털 피풍을 꺼내 들고, 숙비 마마는 직접 두 시진 동안 끊인 불도장을 내어 왔다. 두 분은 젖 먹던 힘을 다해 자매간의 깊은 정을 진 어녀 앞에서 자랑했다. 황후 마마는 침상에 누운 채 그들을 가리키며 웃으셨다. “너희 정말 몇 살이야? 소류아가 너흴 보고 웃겠다.”

 

황상은 황후 마마를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 미앙궁에 몇 번 오가더니,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숙비 마마가 욕을 했다. “요요가 절 위해 낯을 세워준 줄 아나? 다 진채용을 위해서 그런 거지……. 요요가 아직도 절 상대하고 싶어 할까 보냐고! 흥!”

 

황상은 나를 자주 부르기 시작했다.

 

황상이 물었다. “교교아, 요즘 미앙궁에 자주 다니지 않느냐?”

 

나는 그의 손에서 해각황(蟹壳黄)*을 받아먹고 고개를 끄덕이며 웅얼거리면서 대답했다. “황후 마마께서 첩에게 실뜨기를 가르쳐 주셨어요. 첩은 황후 마마가 좋습니다.”

*蟹壳黄: 게 껍질처럼 생겼다고 붙은 이름인데 그냥 빵 같은 거임

 

황상은 웃음을 터뜨리며 교교아는 놀기 좋아한다고 말했다.

 

진가가 무너졌으니 황상의 기분은 당연히 좋았다. 선제는 대신들의 제약을 받아 어떤 일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다. 황상은 형제들 사이에서 혈로를 뚫어 보좌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즉위한 지 오 년도 안 되어 허가와 진가를 무너뜨리고, 황후의 친정인 심가를 쫓아냈다. 비로소 조정을 완전히 손아귀에 틀어쥐게 된 셈이다. 그는 나른하게 나를 품에 안고 내 턱을 치켜올리며 입을 맞췄다. “교교아, 짐이 장담하마. 넌 한평생 무사할 것이다. 우리 아이도 무사할 거야.”

 

 

 


원문 자체에 신조어, 유행어, 영어 단어들이 섞여서 나옵니다... 오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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