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황상이 몰래 안으로 들어와 내 침상 앞에 섰다. 나는 자는 척하려다가, 낮에 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한참 만에 그를 작게 불렀다. “수 오라버니?”
그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내 뺨을 어루만졌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말했다. “교교아, 교교아, 짐이 너를 찾을 수가 없어. 짐이 왜 너를 찾지 못하는 걸까…….”
침상 앞의 달빛이 서리 같이 빛났다. 그의 두 귀밑머리는 이미 전부 희게 세어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그에게 시를 읊어주었다. 첩의 머리카락이 이마를 막 덮을 적에 우리는 문간에서 꽃을 꺾으며 함께 놀았지요. 낭군은 죽마를 타고 와 우물 난간을 돌며 청매로 장난을 쳤어요. 장간 마을에 함께 살던 우리는 허물없는 어린아이였는데. 열넷에 그대의 아내 되어 수줍음에 얼굴도 들지 못하였고, 고개만 숙인 채 어두운 벽만 바라보며 천 번을 불러도 돌아볼 수 없었지요. 열다섯에 비로소 활짝 웃으며 재가 되고 먼지가 될 때까지 함께하길 바라였으니…….
나는 내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를 위로해주다니.
우리는 이렇게 영문 모르게 화해했고 후궁들은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상은 드디어 마음속의 무언가를 내려놓은 건지 뭔지, 내 허리를 껴안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새 수녀는 들이지 않겠다. 궁에 있는 사람도 충분히 많아.”
궁에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이 아니라 그가 실망한 횟수가 많아진 것이다. 나는 그의 품에 기대어 말했다. “수 오라버니가 잘 생각하신 거라면 됐어요.”
황상이 새 수녀를 들이지 않겠다고 했고, 궁중의 옛사람들은 쓸데없이 나서던 이들의 최후도 봐온지라 황궁은 평온해졌다. 하지만 후궁이 잠잠해지자 조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북적(北狄)이 대단한 포부와 재능을 가진 칸을 세웠다. 그들은 병사를 이끌고 싸우는 데 능하여 국경에서 자주 소란을 피웠다. 대신들이 공주를 보내어 화친을 맺자고 제안했다.
궁에서 적령기의 공주는 열여섯 먹은 가락 하나뿐이었다.
숙비는 처음으로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내 손을 쥐고 계속 떨며 작은 소리로 흐느꼈다. “어떡해…… 이를 어떡해…….”
이는 국사다. 국사에 있어서 황상은 늘 냉담하고 무정했다. 우리는 매일 가락을 곁에 딱 붙여두고, 우리 시야에서 잠시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러면 가락을 남겨둘 수 있는 것처럼.
사월 초하루, 황상이 문무대신을 불러 출병할 것을 정식으로 명령했다. 전쟁을 할 거라면 화친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전쟁은 사람이 죽는다. 군사를 이끄는 것은 현비의 아버지 임 노장군이었다. 요서도 정세가 불안했다. 북적은 병사를 둘로 나누어, 한편으로는 끈질기게 요서를 괴롭히고 있었다.
우리는 불경을 베끼고 부처님께 절하며, 복룡사에서 개안한* 단향목 염주를 하나씩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온 하늘의 신불(神佛)이 현비와 숙비의 친정 식구들의 평안을 지켜주기만을 바라며.
*开光: 개광, 혹은 개안. 불상을 만들고 첫 불공 의식을 드리며 처음으로 공양하는 것. (네이버 사전)
황상은 사람을 잘 썼고, 국력도 강성하여 이듬해 북방을 평정했다. 숙비는 숙부와 오라버니 한 명을 잃었고, 현비의 아버지 임 노장군은 전장에서 화살을 맞고 부상이 낫지 않아 사망했다.
나는 숙비 마마가 걱정되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침착했다. “명장(名将)치고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내 숙부와 넷째 오라버니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다가 전장에서 전사했으니 청사에 이름을 남길 거야. 어쨌든 자기들끼리 음모를 꾸미다가 계략에 걸려 죽는 것보단 낫지.”
그녀가 이렇게 냉정하고 이렇게 똑똑히 꿰뚫어 보고 있으니 나는 정말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녀는 홀로 한참 침묵을 지키다 묵묵히 탄식했다. “넷째 오라버니는 싸움에 있어선 소질이 모자랐어. 어릴 적 병법을 공부할 때도,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합격선에 들지도 못했을 거야. 내가 도성에 오면서도 다른 일은 둘째 치고 넷째 오라버니만 그렇게 마음에 걸렸었는데, 역시…….”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손을 뻗어 현비의 등을 두드리자, 현비는 내 어깨에 기댔다. 그녀는 울지도 못하고 처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젠 그분도 절 방비할 필요가 없게 되었어요.”
황상은 직접 성 밖으로 나가 삼십 리 떨어진 곳에서 개선하여 돌아오는 대군을 맞이했다. 그런 김에 도성 근교의 병영을 순시하느라 사흘 정도 궁을 비운다고 했다. 병중인 삼황자와 너무 어린 팔황자를 제외한 다른 황자들이 모두 황상을 따라갔다.
열 살 먹은 장사가 선명한 남색 예복을 입자 조금 어른처럼 보였다. 장사가 장념의 손을 잡고 서서 내 분부를 들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나 대신 임 노장군께 향을 올리는 것을 잊지 말고, 임 노장군께 내가 현비를 잘 돌볼 것이라 전해주라고 했다.
현비는 어쨌든 현비였다. 하룻밤이 지나자 그녀는 진정했다. 강락이 현비의 주위를 맴돌며 어깨를 주물러주고 물도 건네주었다. 작은 고양이처럼 순한 아이였다. 숙비는 현비가 음식을 먹으려는 것을 보고, 직접 뿔닭 볶음, 생선우유탕(奶汁鱼片), 부용새우(芙蓉虾)*, 메추라기 튀김, 행인두부(杏仁豆腐), 복숭아 밀전(蜜饯)*을 차려주었다. 한 상 가득한 음식을 보고 현비도 참지 못하고 미소를 지었다. “아유 언니가 매일 요리를 하지 않으니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우리 전부 공처럼 살이 쪘을 거예요.”
*芙蓉虾: 새우튀김
*蜜饯: 과일 꿀절임
수년이 지나서도 나는 그날의 바삭한 메추라기 구이의 맛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햇볕이 잘 드는 정오, 내가 막 메추라기 구이를 입에 물고서 칭찬을 내뱉기도 전에, 늘 차갑고 남들과 교제하지 않던 순비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을 데리고 미앙궁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녀의 미간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피곤함만 가득했다.
가락은 장억과 강락을 품에 안았다. 내가 일어서자 귀비, 현비, 숙비, 덕비, 그리고 송 첩여와 왕 미인까지 나를 꽁꽁 둘러쌌다. 내가 물었다. “순비, 이게 무슨 뜻인가?”
순비는 한 글자 한 글자를 느릿느릿하고 아무 기운 없이 내뱉었다. 모든 힘을 다 소모해버린 사람 같았다. “황상께서 도성 근교의 병영을 순시하다 암살당하고 황자들의 종적이 모호하다. 삼황자가 장남이니 마땅히 책임을 짊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얼굴만 마주 보았다. 이, 이, 이거 모반이지! 살아서 이런 걸 다 보다니! 진짜 오래 살다 보니 별걸 다 보네! 게다가 모반을 일으킨 사람은 신선 같은 순비다. 반쯤 죽은 척 살던 순비. 이게 웬 신선급 조작이야!
순비는 후궁들을 미앙궁에 가두도록 했다.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도 물어보지 못했다. 다른 황후가 모반을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했는지 나는 몰랐다. 그저 심 소의에게 팔황자에게 밥을 잘 먹이라고 분부했다. 불쌍한 이 아이는 콩나물처럼 병약했다. 밥을 먹지 않으면 끊어져 버릴까 무서웠다.
후궁 비빈들은 울음을 터뜨릴 준비를 하다가, 숙비가 한 상 가득 차려놓은 미식을 보고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격려 아래 다들 상을 깨끗이 비웠다. 사람은 많은데 양은 적어 다들 아쉬워했다. 나는 몇 번이나 순비에게 식사를 대접하려 했다. 모반을 하든 말든 어쨌든 다 같은 후궁 사람이다. 결국 신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서너 번의 초청 끝에야 천천히 걸어오던 순비는 텅 빈 접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는 얼굴에 경련이 일도록 웃는 나를 무시했다.
진짜 세상을 아는 숙비, 현비 이 두 노신선이 내 곁에 있었다. 숙비는 줄곧 내 옆에 딱 붙어 서서 장수 가문 호녀(虎女)의 기백을 한껏 내보였다. “어째, 네 사촌 오라버니한테 반기를 든 거냐?”
순비는 사촌 오라버니라는 말에 눈을 찡그렸다. “나한테 사촌 오라버니는 없어.”
온 귀비와 덕비는 아들들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우리 스스로를 가장 걱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모반은 어린애 장난 같았다. 남양후의 병마는 신병(神兵)처럼 하늘에서 떨어져,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고 궁으로 달려들었다. 황상이 덫을 친 게 아닌가 싶었다.
근데 네가 덫을 놓으려면 놓는 거지만, 빌어먹을, 우리도 덫 안에 있잖아! 황상 당신, 우릴 반적과 함께 한 솥에 넣고 삶을 작정이야!
역시나, 한참 후에 미앙궁 밖에서 칼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흰옷을 입은 소년 장군이 붉은 술을 단 창 하나를 들고 말 한 필을 타고 먼저 미앙궁으로 달려 들어와 반군 셋을 베고선 소리쳤다. “남양후는 이미 주살되었다! 얼른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지 못할까!”
이로써 이 장난 같은 모반은 막을 내렸다. 숨이 붙어 있던 작은 두목처럼 보이는 놈이 무슨 생각이었던 건지 죽기 직전에 온 힘을 다해 내게 칼을 내리치려 했다. 내 얼굴에 ‘베어야 됨’이라고 쓰여 있기라도 하냐고. 이상한 놈일세.
숙비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 순간 소년 장군이 던진 창이 칼을 맞추어 빗나가게 하여 급소를 찌르진 못했다. 나와 가락, 그리고 온 귀비는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우리는 얼른 일어나 그녀를 부축해주었다. 숙비는 입을 벌리고 웃으며 그 소년 장군에게 말했다. “녀석, 몸놀림이 제법이구나.”
그 아이는 죄책감 가득한 얼굴을 하고 단정히 무릎 꿇으며 내게 절했다. “신, 강회근(江怀瑾), 황후 마마를 뵙습니다. 신이 황후 마마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강회근, 강회근이라, 이렇게 묘할 데가, 우리 친정집 큰 오라버니네 아들이랑 이름이 똑같네.
내가 입궁할 때 일곱 살도 안 먹었던 그 아이는 내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울먹였다. “작은 고모, 가지 마요……. 작은 고모, 가지 마요…….”
어느새 십이 년이 지났다. 그 아이는 이제 옥수림풍(玉树临风)의 준수한 소년으로 자라, 올해 무과 장원, 문과 탐화랑이 되었다. 황상은 그 아이를 어림군에 배치하고 내 앞에서도 여러 번 칭찬했다. 전쟁이 끝나면 집안 잔치를 열자고도 했다. 그런데 우리 고모와 조카 간의 재회가 여기에서 있을 줄이야. 이 애가 스스로 가문을 밝히지 않았더라면 알아볼 수나 있었을까!
숙비의 몸에 박힌 칼이 급소를 찌르진 않았지만, 피가 엄청나게 흘렀다. 깜짝 놀라 초조해진 나는 직접 이화궁을 지키며 이불 두 채로 숙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맨 뒤 침상에 쑤셔 넣고 일어나지 못하게 했고, 태의가 상처에 붕대를 감을 때는 궁인들에게 방 안에 화로를 피우도록 했다. 참다못한 온 귀비가 내 뒤통수를 치며 소리쳤다. “번거롭게 하지 마! 지금 유월이거든, 이 바보야!”
나: “피를 많이 흘리면 몸이 식는다고요!”
우리 둘은 싸움을 일으킬 뻔했다. 답답했던 현비는 우리 둘을 한 번씩 걷어 차 주고는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고 모든 일을 확실하게 안배했다. 우리 두 사람은 목을 움츠리고 숙비의 침상 곁에 앉아 태의가 약을 바르는 것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태의는 따가운 시선에 식은땀을 흘렸다.
황상은 사흘이 지나서야 후궁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사흘 동안 천지가 뒤집히는 난리가 일어났다. 남양후는 최근 몇 년 동안 남방의 오랑캐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반란을 모의했다. 그의 구족이 주살되고, 도당 역시 온 집안이 목숨을 잃었다. 삼황자는 대신과 결탁하여 불충하고 불효하였으니 삼척의 백릉을 하사받았고, 순비는 짐주(鸩酒)를 하사받았다. 후궁에 남양후의 수하 대장의 딸인 보림 두 명이 있었는데, 모반과 무관하니 죽을죄는 면할 수 있으나 수일 내로 복룡사로 보내어져 황실의 복을 빌게 되었다.
황상은 결단코 너그럽지 않은 사람이다.
넷째, 다섯째, 장사, 장념이 궁으로 돌아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일을 우리에게 재잘재잘 들려주었다. 그 덕에 우리는 대략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남양후는 황상의 외숙으로서 당시 허가를 상대하는 데에 큰 힘을 썼다. 황상도 그에게 어떤 약속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허가가 무너지자 선황후의 조부 심 노승상이 갑자기 죽더니, 심가 만문이 상을 치른다며 몽땅 귀향해서 십 수 년이 지나도록 기세를 회복하지 못했다. 그 뒤 호국공 진가는 거두어 장사치를 시신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몰락했다. 그러니 남양후가 황상이 어떤 성깔인지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있겠는가? 임 노장군처럼 고개를 움츠리고 머리를 숙이며 조심히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양후는 임 노장군과 다르다. 임 노장군은 황상의 심복이었던 적이 없지만, 한때 남양후는 황상의 가장 큰 지지대였다. 임 노장군의 마음속에서 황상은 황상이지만, 남양후의 마음속에서 황상은 외조카였던 것이다.
황상을 황상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좋은 결말을 보지 못한다.
임가의 딸인 현비는 아들도 딸도 없었지만, 순비에겐 황자가 있다. 바로 이 황자가 남양후가 심은 희망이자 감춰둔 화근이었다.
남양후는 분개했다. 그리고 남방을 지키는 동안 다른 수작을 부리게 되었다. 황상이 계속 그를 내버려두자, 남양후는 황상이 모른다고 여겼다. ——황상이 어찌 모르겠는가? 다만 남양후가 남쪽에서 너무 오래 세력을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에 단칼에 날려버리지 않고 조금씩 무너뜨리기에는 쉽지 않았을 뿐이다.
쉽지 않은 것이지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작년 북쪽에서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황상은 남양후를 도성으로 불러다 ‘공위경사(拱卫京师)’라는 듣기 좋은 이름을 안겨주었다.
남양후는 바보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황상은 당시의 낙백한 황자가 아니었다. 남양후는 마지못해 귀경했다. 황상은 그에게 큰 저택을 하사했고, 다른 것은 없었다.
병권을 잃은 무장은 월경대가 없는 여인처럼 조만간 피를 보게 되어 있다. 허가, 심가, 진가의 최후가 눈에 선했다. 좀 나은 편이면 심가처럼 상갓집 개 마냥 쫓겨날 것이고, 좀 끔찍한 편이면 허가와 진가처럼 온 가족이 저승으로 이주하게 될 것이다. 남양후는 앉아서 죽기만 기다리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황상이 그를 도성에 가두려는 의도는 분명했다. 그를 방비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북쪽의 군대가 개선하고 돌아오는 날에도 그는 남쪽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남쪽에서 그가 아무리 은밀하게 일을 처리했어도 황상이 보낸 인수인이 조만간 밝혀낼 수 있을 터였다.
남양후에게는 퇴로가 없었다. 그는 시산혈해를 뚫고 나온 사람이다. 죽일 수는 있어도 모욕할 수는 없다. 그는 선제공격을 선택했다.
황상이 기다린 것이 바로 그 선제공격이었다. ——임 노장군이 방금 전사했는데 바로 군공이 혁혁한 남양후를 처리하면 다른 장군들의 군심을 흔들었을 수도 있다. 하물며 가장 가까운 외숙부다. 이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숙질간의 깊은 정을 연출했었다. 황상도 자기 얼굴을 때리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남양후가 스스로 황상의 손에 칼자루를 쥐어줬으니, 그걸 받지 않으면 황상이 아니다.
그 뒤의 일은 이해하기 쉬웠다. 남양후는 자신이 황상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 생각하고 궁으로 쳐들어왔다. 우선 삼황자를 제위에 올린 뒤, 다른 황자를 찾아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상이 일부러 그를 궁에 들여보내서 그가 삼황자를 조정으로 데려가 새 황제로 선포하게 내버려 둘 줄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 그렇게 모반 현장에서 딱 걸린 남양후는 변명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자진했다.
이 계획은 정말 완벽하다. 극적 효과를 위해 황상은 황자들을 연극에 끌어들였다. 아이들 몇몇은 정말로 그가 죽은 줄 알고 울다가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작은 장념은 나이도 어린데 너무 많이 울고 너무 놀라서 돌아오자마자 열이 오르고 악몽을 꿨다.
황상은 살벌하고 결단력이 있다. 돌덩어리 같은 심장을 가진 게 틀림없다.
남양후가 안심하고 군사를 이끌고 궁에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 황상은 우리를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반군의 손에 인질로 잡혀 있게 했다. 만일 남양후군의 군기가 엄격하지 않았다면, 만일 순비와 우리 중 누군가가 원한이 있었다면, 궁중의 약골 여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황상이 몰랐을까?
황상은 알았을 수도 있다. 그게 중요하지 않을 뿐이다. 황상은 누군가의 남편이 아니고, 누군가의 아버지가 아니고, 누군가의 외조카가 아니고, 누군가의 사촌 오라버니가 아니다. 황상은 황상이다.
우리는 처음에 삼황자를 안타깝게 여겼다. 멀쩡한 아이가 한 발짝 잘못 디딘 어른의 죄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으니. 그런데 밝혀진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유약해 보이던 애가……. 황상이 시험한다고 공부한 것을 물으면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는데, 뒤에서 그렇게 글씨를 잘 쓰고 문장을 잘 지을 줄 누가 알았겠어? 어떻게 한 장이 남아서 황상의 눈에 띈 건지 모르겠다만……. 군왕은 기만당하는 것을 가장 꺼리는 법이지……. 조사하고 보니, 진작 그 외할아버지와 연락이 닿았다더라. 순비도 비바람을 겪고 살아남았는데, 수중에 쓸 만한 사람 몇몇은 있었겠지…….”
숙비는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음식도 가려야 했다. 침상에 누워있자니 심심해서 버섯이 자랄 지경이었는데 황상을 욕할 거리가 생겼다. “망할 놈, 진짜 속이 시커멓다! 매번 이러지! 우리가 얼마나 미끼처럼 생겼기에 이러는데! 콜록콜록콜록…….”
황상은 피비린내 나는 사흘을 보낸 뒤 미앙궁에 발을 들여놓았다. 수염이 자라고 안색이 초췌했다. 피곤해 보이고 몇 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는 문을 들어서자마자 나를 품에 안고 내 귓가에 가볍게 탄식했다. “교교아, 짐의 외숙부가 떠났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나를 껴안은 채 혼잣말을 했다. “이전에 모비께서 늘 짐에게 외숙 이야기를 하셨어. 가슴에 품은 뜻이 크고 능력 있는 훌륭한 사내라고. 그러면서 짐에게 부황이 아니라 외숙을 닮았다 하셨지…….”
“……모비께서 떠나고 이레 째 되던 날 밤에 열이 났는데, 외숙이 몰래 입궁해 내게 약을 먹여주었어. 나는 그전까지 외숙을 만난 적이 없는데 그때 한눈에 알아보았지……. 외숙은 나를 보러 몰래 궁에 들어온 것이고, 곧 싸우러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를 안아주었어. 부황도 나를 한 번 안아준 적이 없는데……. 외숙은 자기가 전쟁에 나가 대장군이 되어 돌아오면 아무도 나를 괴롭힐 수 없을 거라 했지…….”
“그런데 죽었어! 내 외숙부가 죽었다!”
“외숙부가 죽었어! 난 이제 외숙부가 없어!”
그는 어린아이처럼 나를 안고 중얼거렸다. 그의 이마를 쓰다듬어보니 심하게 뜨거웠다. 이미 열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황상은 이틀을 앓았다. 외숙부를 부르다, 모비를 부르다, 교교아를 불렀다. 나는 이틀 동안 그를 돌보았다. 병이 나은 그는 즉시 길일을 택하여 남양후 일가 노소를 저승길로 보냈다.
순비에게 짐주를 하사하던 그날, 숙비가 그녀를 배웅하러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와 현비가 좌우로 숙비를 부축해주었다. 길가의 무성한 꽃나무 사이로 맑은 새 지저귐이 들렸다.
순비는 자신을 아주 체면 있게 단장했다. 그녀의 흰 옷은 신선의 옷자락처럼 팔랑팔랑 휘날렸다. 순비는 여전히 저 높은 곳에 앉아 인간 세상의 음식 따위 먹지 않는다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는데, 숙비와 현비를 보고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숙비가 말했다. “널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지냈으니 배웅이라도 하려고 왔어.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이라도 있나?”
순비가 픽 웃었다. “친정도 아들도 다 죽었는데 마무리랄 것을 할 게 있겠나?” 그녀는 아주 피곤해 보였지만, 웃는 얼굴은 태연하고 편안했다. “드디어 죽을 수 있게 됐어.”
“배웅하러 와 주어서 고마워. 난 늘 말을 잘 못했고, 친구를 사귈 줄도 몰랐어. 이전엔 너희를 미워하기도 하고 불쌍해하기도 했지. 너흰 그가 허가를 대적하기 위한 바둑돌일 뿐이라고, 심운요는 나를 위해 준비된 방패막이일 뿐이라고 여겼거든. 기를 쓰고 바둑알 두 개와 방패막이 하나랑 깊은 교류를 나눌 가치는 없잖아?”
그녀는 웃음을 지었다. 허무한 눈빛은 멀고도 어렴풋한 무언가를 보듯 흐릿했다. “나는 그의 사촌 누이고, 그는 내 사촌 오라버니야. 내 아버지의 유일한 누이가 남긴 유일한 핏줄. 나와 그야말로 한 가족이야. 우리, 우리야말로 한 가족인데.”
그녀는 목소리를 높여 웃었다. “우리야말로 한 가족이야! 우리야말로!”
“오라버니!”
“오라버니!”
“우린 한 가족이잖아요! 우리야말로 한 가족이라면서요!”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짐주가 든 잔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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