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의 팔황자를 낳은 심 수의는 심 소의로 승진했다. 회임 중에 황상의 수녀 선발을 맞닥뜨리게 된 이 바보 아가씨는 마음이 울적해져 건강도 나빠졌다. 팔황자는 병든 고양이처럼 약해서, 세 살이 되어서야 겨우 잘 걸어 다니게 되었다.
오 년 동안 황상은 수녀를 두 번 선발했다. 처음에 황상은 심 소의를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첫 번째 선발에서 간택된 수녀 중에 양(杨)씨가 있었는데, 활발하고 사랑스럽고 천진하고 수려하게 생긴 것이 제2의 나 같았다. 황상은 그녀를 끝없이 총애하여 양 미인에 봉했다가 열흘 뒤에는 양비에 봉했고, 장락궁에서 지내게 하며 한 달 동안 그녀만 찾았다. 그러다 그녀가 후궁을 독점하기도 전에, 사적으로 친정과 연락하며, 오라비가 관직이 낮은 관리의 딸을 강제로 첩으로 들이는 것을 몰래 도운 것이 발각되었다.
양비는 어사대부의 탄핵을 앞당겼다. 황상은 조정에서 대신들에게 공공연하게 지적을 당했다. 형제, 자네 안목이 글렀어, 자네 작은 마누라가 뒤에서 일을 꾸미고 있었다고. 그 자리에서 양 대인은 곤장 스무 대를 맞고 감옥에 갇혔다. 불쌍한 양 대인은 밖에서 황상의 장인을 자처하고 다니다 눈 깜짝할 새에 사위에게 얻어맞아 어머니 아버지를 찾는 신세가 되었다. 이는 우리에게 한 가지 도리를 재차 일깨워주었다. 아무렇게나 남의 아버지가 되려고 했다가는 좋은 결말을 맞지 못 하리라.
선제 때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늘까지 진동시킬 엄청난 죄다. 황상은 크게 노하여 양비를 때려죽이려 했다. 나는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양비가 회임한 것을 보아 관대하게 처분해 주십사 빌었다. 황상은…… 황상은 나를 품에 안고 내 눈을 가리더니 그대로 그녀를 때려죽이도록 했다.
양가는 몰수당했다.
천자의 노여움은 천둥과 번개가 몰아닥치는 것과 같았다. 우리가 뒤에서 몇 마디 투덜거리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한 걸음 잘못 디뎌 황상의 금기를 어긴다면, 그것은 일가의 목숨이 걸리는 일이 된다.
양비가 죽자 황상은 다시 심 소의가 떠올랐다. 하지만 심 소의는 양비의 죽음에 깜짝 놀라 간담이 서늘해졌고, 난산까지 겪은지라 사람 자체가 초췌해졌다. 눈의 영기도 사라졌다. 황상은 두어 번 그녀를 찾아간 뒤로는 다시 발걸음 하지 않았다.
황상의 마음에 든 수녀가 한둘쯤 더 있었다. 황상은 가끔 그녀들을 보러 갔고, 덕분에 궁에는 육공주가 생겼다. 공주의 생모 초(肖) 어녀는 초 숙의에 봉해졌다. 초 숙의는 수작질에 일가견이 있었다. 사흘이 멀다고 육공주의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내가 보내는 사람을 차단했다. 그녀를 상대하기 귀찮아진 황상은 미인으로 지위를 강등하고 육공주도 보러 가지 않았다. 초 미인은 제가 황상의 마음에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자 너무 큰 타격을 입었는지 병이 들었다. 병이 나았을 즈음 황상은 이미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자주 그들 모녀에게 따로 물건을 챙겨주지 않았더라면 육공주를 키울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두 번째 선발에서는 이부상서 손(孙) 대인의 어린 손녀를 간택했다. 작은 소녀는 공작새처럼 자랑스러워했다. 다른 건 제쳐두고, 옆얼굴이 냉궁의 요비와 조금 닮은 이였다. 황상은 그녀를 첩여에 봉하고, 무슨 말이든 다 들어주었다.
손 첩여는 가족의 총애를 받고 자란 소녀인데, 궁에 오자마자 또 황상의 총애를 받게 되자 승리감에 도취되어 사람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황후로서 절대 그녀를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나는 손 첩여를 불러, 궁에서는 단결하고 우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금강경을 다섯 번 베껴 쓰며 충동적인 마음을 다스리라고 했다.
다섯 번이다, 다섯 번…… 고작 다섯 번이라고! 궁에서 다섯 번 베끼는 것은 사사오입으로 한 글자도 베낄 필요 없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아이는 수완이 남달랐다. 일부러 추운 곳에서 덜덜 떨다가 풍한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황상이 화가 나서 나를 찾아왔다.
입궁한 지 거의 십여 년 만에 드디어 제대로 된 궁중 암투를 맞이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황상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방법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써먹지 않았다. 며칠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마저 떠나셨다.
할머니의 가장 어린 막내 손녀인 나도 이미 세 아이의 어머니이니, 할머니는 장수하신 셈이다. 그분은 네 번의 왕조를 거치셨다. 같은 항렬의 공주가 스물한 명이 있었는데, 셋은 화친으로 보내졌고 일곱은 하가할 때까지 살지 못했다. 할머니는 요행히 평안하게 자라셨다. 그분은 당신의 부황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다 다행히 젊은 진사였던 할아버지에게 하가하여 서로 은애하셨다. 총애받던 다른 자매들의 대다수가 적서 쟁탈에 참여했다가 처참하게 죽었다. 선황이 제위를 계승했을 때, 할머니의 그토록 많은 자매 중 넷만이 대장공주(大长公主)*에 봉해지는 복을 누렸다. 그리고 이 네 명 중 두 사람은 인화태후와 대적하다 영문도 모르게 죽었고, 한 사람은 훗날 때를 기다리던 황상의 보복으로 도성에서 쫓겨나 우울하게 생을 마쳤다. 할머니만이 평안하게 황상의 재위 십사 년이 될 때까지 살아남으셨다.
*황제의 고모
내가 궁에 있는 요 몇 년 동안 할머니는 가끔 입궁하여 나를 만나곤 하셨다. 할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류아, 착하게 잘 있어야 한다. 착한 작은 황후로 살아서 평안하게 나이 들면 된다.”
어머니가 망령이 나서 나를 곤란하게 할까 봐,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상의한 후 황상에게 서신을 올려, 내 아버지를 서주(徐州)의 자사(刺史)로 임명되도록 했다.
할머니가 떠나자 이 인간 세상에 대한 나의 사랑은 한참 줄어들었다.
나는 황후라는 직업은 모욕에 맞서서도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상황을 역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좀 멍청해서 이 직무에 합당하지 못하다. 감정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황상의 분노를 마주하고서도 무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황상의 말씀이 옳습니다. 벌을 내려주십시오.”
나의 이런 모습이 황상의 어떤 기억을 끄집어낸 건지, 그는 화가 나서 내게 삿대질하며 ‘너너너’ 이 소리만 한참을 하다 결국 소매를 뿌리치고 나가 버렸다.
그날 밤 온 귀비와 숙비가 달려왔다. 숙비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우리 아가! 소류아! 작은 어르신! 따라 할 게 없어서 황제놈이랑 화내는 것까지 따라 하니! 화내면 몸이 상해! 착하지, 정말 화가 난 건 아니지? 황제놈 펄쩍 뛰게 만드는 건 괜찮지만, 그렇다고 너까지 화를 내면 안 돼!”
온 귀비가 욕을 퍼부었다. “황제놈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나이만 먹고 머리는 하나도 안 자랐어! 퉤! 멍청한 자식!”
나는 숙비 마마의 품에 파묻혀, 십 년 전 궁에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억울하고 억울하게 울기 시작했다.
손 첩여는 이 일을 겪으며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황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손 소의로 올려 내 얼굴을 때렸다. 나는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아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현비와 덕비가 깜짝 놀라서 찾아왔다.
현비가 거듭 나를 타일렀다. “마마, 일시의 충동 때문에 함부로 행동하시면 안 됩니다. 생각해보세요, 마마께서 중궁에 들고 칠 년이 지나는 동안 궁의 얼마나 많은 비빈들이 마마의 상냥함과 자애에 기대어 지금껏 편안히 살 수 있었습니까. 못된 꿍꿍이를 품은 멍청한 이들도 마마께서 조용히 깨우쳐주셨기에 작은 잘못을 교훈 삼아 큰 죄를 저지르지 않은 게지요. 후궁의 평화는 전부 마마께 달려 있단 말입니다! 저흴 저버리시면 안 되어요!”
덕비도 눈물 콧물을 흘리며 말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혀도 차지 못했다. “마마! 마마께서 황후로 계시는 동안 궁의 아이들 모두 무사히 태어나서 무사히 자란 것만 보아도 마마의 흉금을 알 수 있습니다! 옹졸한 사람이 황후가 된다면 이렇게 많은 아이들의 절반도 살아남지 못할 거예요. 게다가 이런 단결과 우애가 끊어질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가볍게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칠 년이다. 나처럼 멍청한 사람이 칠 년 동안 현명한 황후 노릇을 했단다.
요 몇 년 궁의 풍조는 확실히 좋았다. 윗 들보가 바르니 아래의 기둥이 비뚤어지지 않는 이치일 것이다. 손 소의가 이렇게 득의했지만, 새로 입궁한 몇몇 철부지들이 그녀에게 아첨하는 것 외에는 그녀와 결탁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내가 상심할까 봐 다들 미앙궁으로 달려왔다. 나와 조금이라도 친한 사람들은 상심하지 말라며 나를 달랬고, 나와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게 선물을 보내거나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며 내가 웃기를 바랐다.
한때 천방지축이었던 초 미인은 육공주를 안아 와, 아직 말이 서툰 육공주에게 모후라 불러 보라며 즐거움을 더했다. 그리고는 쭈뼛대며 “마마, 보중하세요.”라고 했다. 골골대는 심 소의도 허약한 팔황자를 데려왔다. 담이 작은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마음에 두지 말고 털어버리세요.” 팔황자는 작은 고양이처럼 나를 모후라 부르며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숙비 마마가 말했다. “우리 소류아가 자애롭지. 황후가 되어서 모두에게 얼마나 잘했어? 다른 황후가 와도 너만큼 잘해주겠니? 다들 바보가 아니야. 황상은 그네들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지만, 너는 무척 신경을 썼잖아. 네가 황후로 하루를 있으면 그들의 평안한 일상이 하루 더 이어지는 거야. 후궁에서 오래 지낸 이들은 잘 알고 있어. 다들 네가 당장 황상과 화해해서 다시 총애받기만 바란다고.”
나는 정말이지 황상이 그의 후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황상은 일방적으로 나와 냉전하며 손 소의를 더 심하게 총애했다. 그리고 나는, 숙비 마마가 구워준 삼선 오리 혓바닥과 취방육*을 먹고, 온 귀비가 새로 지어준 비 내린 다음 날의 푸른 하늘 같은 색깔에 은사로 모란을 수놓은 대수삼(大袖衫)을 입자 왜 화가 났는지 진즉에 잊어버렸다.
*醉蚌肉: 홍합 요리의 일종
그렇게 석 달이 지나 손 소의는 회임하여 손비로 승진했다. 귀현숙덕 사비는 미앙궁에서 반나절을 토론했다. 그들은 내 의견은 완전히 무시하고, 잠시 움직이지 않고 기회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손 소의가 송 첩여와 왕 미인을 모욕해서 그들이 자신에게 달려들어 아이를 해치도록 도발하고, 그것이 내 지시였음을 암시하려 시도했을 때, 온 귀비는 웃으며 인증과 물증을 황상 앞에 하나씩 던져놓았다. 손비는 회임한 적이 없다. 이전의 구토는 단순히 위가 상해 그런 것이었는데 회임이라 오해한 것이다. 회임이 아닌 것을 알게 된 후 황후 마마를 해칠 계략을 세웠으니 뻔뻔스러운 야심을 품은 것이다!
이 증거들은 만능 현비가 덕비의 도움을 받아 찾아낸 것이다. 우선 움직이지 않고 기회를 엿보며 제 발등을 찍을 때까지 기다리는 판은 숙비 마마가 짰고, 송 첩여와 왕 미인은 주연을 맡았다. 온 귀비가 증거를 내미는 역을 맡은 이유라면 그녀가 사비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이다. 번쩍번쩍 빛나야 하는 명장면에서는 쓸모가 있다.
숙비 마마는 병법 강의를 하듯 우리에게 분석해주었다. 황상은 항상 대장군부를 견제하고 있으니 현비가 나서면 황상의 예민한 신경을 건드릴 수 있다. 숙비 자신은 황상과 남이나 다름없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덕비는 황상의 총애를 받은 적이 있고 지금도 황상은 때로 정녕궁에 들르니 가장 적임자였지만, 말이 많아지면 ‘쯧쯧쯧’과 ‘그쵸’가 튀어나오는 것을 고려하면 너무 진지하지 않으니 궁중 암투와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 역시 근정묘홍(根正苗红)*의 온 귀비가 가장 적당하다. 온 귀비의 아버지는 십수 년 동안 황상이 가장 신임하는 대신 순위 1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그녀는 자체 후광을 단 것이나 다름없었다.
*根正苗红: 뿌리가 바르고 싹이 붉음. 문혁 시기 용어로 출신 좋고 근무태도 좋고 정치적으로도 바르다는 뜻. (네이버 사전)
나는 무얼 했느냐면, 어…… 토론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손뼉을 치며 그들을 고무했다.
온 귀비는 위엄있게 연설을 마쳤다. 우리만이 그녀가 어젯밤에 머리를 잡아당기며 자시까지 원고를 외웠고, 지금 왼손 손바닥에는 작은 글씨로 베껴 쓴 대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황상은 줄곧 후궁들의 잔꾀를 싫어했다. 선을 조금이라도 넘는 행위는 그에게 인화태후를 떠올리게 했다. 손비는 총비와 황상은 그의 심리적 그늘을 건드리는 온 귀비의 말 몇 마디로 갈라질 수 있는 사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황상은 인증과 물증이 다 갖추어진 것을 보자마자 낯빛을 바꾸었다. 폐서인은 당연하고, 그녀를 냉궁에 집어넣어 미쳐버린 요비와 함께 지내도록 했다.
손비는 끌려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소리쳤다. “황상! 황상! 수 오라버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온 귀비는 이 모든 것을 나에게 전하며 냉소를 연발했다. “수 오라버니는 무슨, 다 늙어서 올해 서른여섯인가 일곱쯤 됐는데. 손비는 겨우 열여섯이라고. 그 애 아버지뻘이래도 이상하지 않은데 오라버니 같은 소리! 퉤퉤퉤! 역겨워서 하룻밤 묵은 음식을 다 토할 뻔했다.”
현비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후궁에 정말 인재가 다 떨어졌네요. 요 몇 년 중에서도 손비만이 얼마 안 되는 재주로 판을 짰잖아요. 별로긴 했지만, 어쨌든 판이라 할 만은 해요. 허선방이 죽고 후궁에서 사는 게 너무 편해져서 우리 수완도 다들 녹슨 것 같아요. 이런 허술한 일도 사비가 연합해서 사흘을 조사했다니. 아휴, 다 됐네, 다 됐어.”
숙비는 그녀와 함께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선방을 겪어보지 않은 자, 궁중 암투에 대해 논하지 말라. 허선방을 거치고도 살아남은 비빈들은 다 고수야. 우리 둘은 진짜 고독한 고수지.”
두 사람은 술 대신 차로 건배했다.
온 귀비와 덕비는 승복하지 않았다. “우리도 허씨가 총애받는 걸 봤던 사람이거든!”
숙비가 허허 웃었다. “흥! 너희가 입궁하고 일 년도 안 됐을 때 황상이 허선방을 냉궁으로 보냈잖아. 그때 허선방은 우리 둘이랑 요요랑 순비 쳐다보기도 바빴는데 너흴 상대할 시간이 어딨어?”
온 귀비도 허허 웃었다. “새벽이 오기 전의 어둠이 제일 견디기 힘들다고! 난 입궁하자마자 걔 입에서 요상하게 황후 마마께 불경을 저지른 게 되었단 말이야. 나도 요요 언니도 뭐가 뭔지 몰랐어. 그리고 난 한 달을 갇혀 있었다고! 도대체 그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났던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
그래서 넷이서 다시 건배를 했다. 나는 그들이 어깨동무하면서 곧 향을 피우며 의자매를 맺는 절이라도 할 것 같은 꼴을 보고 얼른 끼어들었다. “우리는 진 귀비를 겪었어요! 진 귀비도 인재였다고!” 송 첩여와 왕 미인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숙비는 다시 허허 웃었다. “진채용과 허선방 사이에 현비 백 명, 나 이백 명, 덕비 삼백 명, 그리고 온원원 만 명이 들어갈 만큼 차이가 나거든! 진채용도 처음엔 머리가 있었어. 오만하긴 했지만, 분수는 지켰지. 그러다 황상이 일부러 종용하는 바람에 머리에 물이 차서 제 무덤을 파게 된 거야. 그래도 걘 제 무덤도 정도껏 팠어. 입만 살아서 남 욕이나 하고 사람도 대놓고 괴롭혔지. 음모의 기운이랄게 전혀 없으니 무시하기만 하면 됐어. 허선방이야말로 틈만 있으면 파고드니, 막으려야 막을 수도 없는 인간이었지.”
현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진채용은 황상이 그 친정의 약점을 잡고 싶어서 그녀가 날뛰길 바랐기 때문에 날뛴 것뿐이죠. 진채용 본인은 수완이랄 게 없었어요. 우리도 황상께 협조하려고 진채용과 대적하지 않았고요. 허선방은…… 정말로 천재였어요. 마음도 모질고 수완도 독하고. 저는 그녀를 극도로 미워하지만, 진심으로 승복할 수 있어요. 허선방이 허가의 세를 빌어 매번 손을 쓸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그 뒷배가 없었어도 그녀는 여전히 대단했을 겁니다. 그때 철저하게 이용당하고도 허 마마가 가장 좋은 사람이라 여겼던 어리숙한 아가씨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요.”
숙비는 몸을 움츠리며 팔을 껴안았다. “걘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인간이었어. 겉으로는 항상 화기애애했지만……. 우리가 전생에 얼마나 심한 죄악을 저질렀길래 걜 만나게 된 건지! 그래도 아쉽지. 걘 황제놈이랑 똑같이 사람됨이 글러 먹었거든. 사내로 태어났다면 당시 허가의 가세로는…… 이 천하가 어떻게 되었을지 분명히 말하기 어려워! 요요 그 바보는 처음엔 걔가 좋은 사람인 줄 알고 대신 불공평한 일도 따져주었는데……. 에이, 젠장. 우린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야!”
현비가 말했다. “조정이 불안하니 후궁도 딴마음을 품기 마련이지요. 황상이 이쪽에 의지해 저쪽을 견제하면 공정하기 어렵고 황후도 관여하기 어려워요. 황제가 공정하지 않고 황후가 관여치 않으면 후궁이 혼란해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죠. 선황후께서 얼마나 좋은 분이었어요. 좋은 시절을 따라잡지 못하신 게 아쉽지요. 그땐 한참 혼란한 시기였고, 달리 방도가 없었죠. 게다가 선황후께선 내려놓지 못하셨어요. 선황후께서 조금만 몸을 낮추고 총애를 회복했더라면 그토록 힘들게 지내지 않아도 되셨을 텐데. 우리도 좀 더 편히 지낼 수 있었고요.”
숙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요요는 절대 그 자식한테 굴복하지 않았을 거라고! 요요는 그 자식 안 좋아했어! 무슨 헛소리야! 난 좀 처참하게 살고 말지, 요요가 굴복하는 꼴은 못 봐!”
현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압니다, 알아요. 저도 그냥 해본 소리였어요. 지금은 살기가 편하죠. 전 속으로 황상께 감사하고 지내요. 조정을 깨끗이 정리하여 후궁 비빈들도 세력이랄 것이 없어지니 첫째도 둘째도 법도에 따르게 되었지요. 황상이 속으로는 따로 셈이 있다는 데도 감사하고요. 총비 고르는 눈은 글렀어도, 도리를 따지는 편이니 잘못을 두둔하진 않잖아요.”
숙비는 아저씨처럼 의자에 기대 누워 있고, 나와 온 귀비가 양쪽에서 그녀의 무릎을 안마해주었다. ——서른이 넘은 뒤로 그녀의 무릎에 난 옛 상처가 비만 오면 심하게 아팠다. 숙비는 남의 재앙을 고소해하며 말했다. “황제놈이 여자 보는 눈은 우리보다 한참 떨어지지. 그 자식이 그만큼 위선적이고 사람 귀찮게 굴지만 않았으면 우리가 대신 총비를 골라줬을 텐데. 하나같이 착하고 귀여운 사람만 골라줬을 거라고.”
덕비가 고개를 저었다. “쯧쯧쯧, 그건 틀린 말씀이에요. 황상이 총애를 어떻게 하는지 보세요, 그렇잖아요. 황상의 총비는 총애하면 할수록 맛이 가요. 황상이 육아 지식을 제대로 안 배워 그렇죠. 지나치게 귀여워하면 오히려 아이를 망친다는 도리를 모르는 거예요, 그쵸? 쯧쯧쯧, 막 입궁한 어린 아가씨한테 열흘 동안 다섯 계급을 올려주고 무슨 물건이든 다 보내주고 온갖 낯간지러운 말을 해대니, 어느 아가씨가 그 총애를 받고 제가 황상의 보물이 되었다는 착각을 안 하겠어요? 누가 이성을 유지할 수 있겠어요! 쯧쯧쯧, 황상이 조금이라도 절제를 했다면 사람을 그렇게 망치진 않았을 거예요, 그쵸? 그동안 총애를 독차지했던 총비들을 생각해보세요. 허선방, 진채용은 조정과 관련되어 있었으니 예외로 두고, 그 뒤의 이 총비들 말예요. 황후 마마을 빼면 전부 그놈의 총애 때문에 바보가 되어 제 무덤을 파지 않았어요? 쯧쯧쯧, 역시 우리 소류아가 똑똑하고 영리하니 삐뚤어지지 않았죠, 그쵸?”
생각해보니 덕비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당시 나는 겨우 열네 살이었다. 황상은 내 머리를 빗겨주고 내게 밥을 먹여주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장가도 불러주었다. 게다가 승진도 시켜주고 매일 상을 내리며 말끝마다 날 교교아라고 부르면서 자기를 수 오라버니라 부르라고 했다. 내가 총애를 받으면서도 엇나가지 않은 건, 순전히 조부모님이 참 잘 가르치신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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