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소훈(昭训)은 이 일을 겪고 차분해졌다. 협객이라든지 전설이라든지 하는 말을 다시는 그녀의 입에서 듣지 못했다. 오히려 길상 고고의 요리법을 열심히 배웠는데, 꽤 그럴싸했다.
놀란 태자비는 조산했다. 섣달 이십칠 일에 쌍둥이를 낳았다.
태자는 아이를 안고서 태자비의 손을 잡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교교아, 우리 아이야.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몸조리만 잘 하면 돼. 교교아, 우리 아이들은 뭐든지 다 가지게 될 거야. 다시는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할 거다.”
단장하지 않은 흰 얼굴의 태자비가 손을 들어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수 오라버니, 난 억울함을 못 참는 게 아니에요.”
그녀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동궁을 좋아하지 않을 뿐이다.
그녀도 길상 고고처럼 이복귀에게 몰래 수다 떨기를 좋아했다. “복귀, 나는 여기가 싫다. 나도 싫어하고 아유도 싫어해……. 다들 피곤하지 않은 걸까? 수 오라버니, 허 양제, 황후 마마, 다들 피곤하지 않은 걸까……?”
그들이 피곤한지 안 피곤한지는 모른다. 그러나 쉴 생각이 없다는 건 확실했다. 섣달그믐 밤, 다른 집은 부모와 자녀들이 한데 모이는데, 작은 장평은 주 소훈의 품에서 허 양제에게 ‘건네져’ 떠나갔다.
태자비는 태자의 소매를 붙잡고 물었다. “수 오라버니, 허 양제가 장평을 잘 보살펴 줄까요? 양제 처소에 아이가 울면 안고 달래줄 사람이 있을까요?”
태자는 그녀를 끌어안고 어린 딸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여러 번 입을 벌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작은 장평이 돌아왔을 때, 아이는 이미 울 수 없게 되었다.
태자비는 이미 차가워진 아이를 안고 바닥에 주저앉아 피를 토했다. 두 눈은 텅 비었고, 입을 벌려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복귀와 주 소훈이 달려가 부축하려 했는데, 무척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내 장평…….” 그리고 태자비는 아이를 안은 채 졸도했다.
태자는 밤이 늦어서야 그녀를 보러 갔다. 자그마한 사람이 두꺼운 비단 이불에 덮여 있었다. 뺨은 여전히 젖어 있고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지만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태자는 침상 곁을 지키며 옛날 길상 고고가 부르던 강남의 민요를 흥얼거렸다.
“달이 구주(九州)를 굽이굽이 비추니, 어느 집은 즐겁고 어느 집은 근심하네. 어느 부부는 한 능라 휘장 아래 눕고, 어느 방랑자는 밖을 떠도는구나…….”*
*《월자만만조구주(月子弯弯照九州)》: 月子弯弯照九州,几家欢乐几家愁。几家夫妇同罗帐,几个飘零在外头。남송 시기 강남의 오吴 지방에서 유행한 민요. 남송은 외부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내부로는 지배층이 백성을 탄압함. 대조법을 사용해 하층민의 고통스러운 삶을 반영함.
“달이 구주를 굽이굽이 비추니 어느 집은 즐겁고 어느 집은 근심하네. 어느 부부는 한 휘장 아래 눕고, 어느 방랑자는 밖을 떠도는구나.”
그는 노래를 반복해서 흥얼거렸다. 태자비의 얼굴에서 두 줄기의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는 다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들은 시종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작은 장평의 죽음은 조왕당(赵王党)의 몰락을 가져왔다.
조왕비의 친정도 허씨 집안의 방계였다. 허 태사가 죽은 뒤, 허 황후의 오라비이자 허 양제의 아버지인 허 태위(太尉)가 가주가 되었는데, 이 사람은 능력은 별 볼 일 없지만 성질은 대단했다. 허가의 다른 친척들은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이미 물밑에서는 서로 암투를 벌여대고 있었다. 선태자 주변에도 허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태자비는 허씨였지만 허 황후에게는 촌수 차이가 나는 질녀였다. 그러니 어디 친 조카딸보다 믿을 만하겠는가? 게다가 선태자는 생모를 그리워했다. 정말이지 은혜를 모르는 녀석이었다. 허 황후 남매는 아무 거리낌 없이 선태자를 제거해 버렸다. 이는 ‘집안을 정리한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허씨 집안의 다른 사람들의 노여움을 샀고, 조왕비의 아버지를 위시한 이들은 조왕 곁에 모여서 공개적으로 허 황후와 맞섰다.
조왕비가 황손을 모해했다. 이는 대역무도한 짓이었다. 태자는 조정에서 조왕비의 아버지가 허 태사의 청명(淸名)을 더럽혔다고 통렬하게 질책하며, 무릎을 꿇고 애통하게 울었다. 허 태위도 당장 눈물을 뽑아내며, 이 일은 가문의 불행이라 마음이 그지없이 아픔을 표했다. 그러면서 반드시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외쳤다. 허 황후는 비녀를 뽑고 머리를 풀어 황상 앞에 꿇어앉아, 자기 때문에 허가의 불초한 자손의 죄를 용서하지 말라고 주청했다.
허가는 줄곧 목을 빳빳이 세우고 거만했는데 갑자기 무릎 꿇고 울어대니 황상은 심하게 놀랐다. 황상은 당장 성지를 내려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반드시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했다. 허 태위의 장자는 제 손으로 그날 당장 조왕비의 아버지를 옥에 가두었다. 이렇게 신속할 수가. 심 노승상마저도 공정하고 사심 없는 허 태위의 공을 표창하는 상소를 올렸다.
작은 장평이 진짜 조왕비에게 숨이 막혀 죽었는지가 중요한가? 누가 그걸 신경 쓰겠는가.
어린 아들의 죽음과 조정의 싸움, 어느 쪽이 경하고 어느 쪽이 중한지는 아주 분명했다.
주 소훈은 밖에서 들은 이야기를 태자비에게 조금씩 말해주었다. 기다란 평상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는 태자비의 미간에 쓸쓸함이 감돌았다.
“아유, 저 사람들 정말 대단해, 그렇지? 왜 이전에는 그가 이렇게 대단한지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이복귀는 어어어어 하며 태자를 위해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태자비가 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복귀야, 난 그저 그가 상심하지는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었어.”
그녀는 창밖의 푸른 대나무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아마 슬프겠지. 하지만 시간이 없어.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이런 사람에게 난 어울리지 않아.”
회임한 허 양제가 태자비를 찾아와 눈물을 흘렸다. “마마는 말할 것도 없지만, 저도 마음이 참……. 제 곁에서 백여 일이나 잘 자라고 있었는데, 어떻게, 어떻게…….” 그녀는 진심으로 눈물을 흘렸다. 눈시울도 장단 맞춰 붉어졌다. 그녀가 숨을 헐떡이고 흐느낄 때마다 이복귀는 작은 장평이 막 태어났을 때의 우렁찬 울음이 떠올랐다.
그때 태자가 뭐라고 했던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복귀야, 아이가 이렇게 잘 우니 분명히 장명백세(长命百岁)하여 나라를 태평성세로 다스릴 것이다!”
허 양제가 그렇게 슬피 울자 주 소훈이 끼어들려는데, 태자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주 꽉 잡았다. 자리가 파한 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정의 난리가 일단락되고 태자비의 병도 조금 나아졌다. 태자와 태자비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사방에 침묵이 내렸다.
“요요, 교교아, 며칠 뒤에 별원에 데려가 주마, 응? 아니면 주 소훈과 함께 가도 돼. 주 소훈은 말을 탈 줄 아니까 따라서 배울 수도 있잖아.”
“며칠 뒤에 친정에 같이 다녀올까? 오늘도 할아버지가 네 안부를 물으시더라. 장모님이 널 보러 오셨던 며칠 동안은 평소보다 죽도 반 그릇 더 먹었잖아. 장모님을 궁에 불러서 며칠 더 지내게 하셔도 괜찮아.”
그는 그녀의 가느다란 손을 잡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태자비는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듣고 있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 첩은 조왕비 허씨를 보러 가고 싶습니다.”
태자는 그녀의 손을 보았다. 그녀는 태자를 보는 듯도 했고, 아무것도 보지 않는 듯도 했다. “그녀를 보러 가고 싶어요. 참 좋은 사람인데. 작년에 궁중 연회에서는 제 옷이 예쁘다고 칭찬도 해주었어요.”
“어쩌면, 그녀가 저편으로 가게 되거든, 저 대신 장평을 좀 돌봐달라고 부탁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태자비가 이복귀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을 때, 옆에는 높다란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줄기가 구불구불하고 울창했다. 서늘한 바람이 스치자, 무성한 나뭇가지와 잎사귀 사이에서 매미 울음소리가 들렸다.
“녹엽 무성하고 열매가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렸구나.”*
*《두목-탄화(杜牧-叹花)》: 绿叶成阴子满枝 혼인한 여자가 아들과 딸을 낳고 자손이 많음을 비유함.
태자비는 거친 나무껍질을 쓰다듬으며 이 몇 자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조왕비는 조왕부의 외딴 뜰에 갇혀 있었다. 조왕의 희첩과 자녀들은 조왕을 따라 황릉을 지키러 갔다. 왕년에 오색 화려하고 부귀한 기상을 지녔던 왕부는 망망한 황야처럼 고요했다. 경비병이 세 사람을 데리고 나왔는데, 가장 앞에 서 있던 열둘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훌쩍훌쩍 울면서 걸어 나오다 태자비와 마주쳤다. 그 아이는 절도 올리지 않고 인사도 올리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태자비를 노려보면서 “전부 당신 때문이야”라는 말만 남기고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태자비 마마, 이쪽으로 오십시오. 방금은 호국공 댁의 여섯째 아가씨로, 안에 계신 분과는 이종사촌 자매라고 합니다. 요 며칠 동안 유일하게 방문한 사람입니다.”
태자비가 나지막이 탄식했다. “보기 드문 우애로구나.”
죽음을 앞둔 조왕비는 어엿하게 단장하고 있었다. 빗으로 머리를 빗으면서 태자비를 보고도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심운요, 날 배웅하러 온 건가? 잠시만 기다려 줘, 금방이면 돼.”
태자비도 아무 말 않고 빗을 가져와 그녀의 머리를 빗겨 주고는 쪽을 쪄 주었다. 그리고 비녀를 꽂으며 작게 속삭였다.
“알아. 네가 아닌 거.”
조왕비는 끝내 비통한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한 짓이 아니야! 내가 아니라고!!!”
그녀는 태자비의 품에 기대어, 하늘이 불쌍히 여겨 유월의 눈*을 내려주길 바라듯 몇 번이고 소리쳤다. 하지만 집 밖에서 햇볕을 쬐던 고양이를 놀라 달아나게 만들었을 뿐이다. 사방은 조용했다.
*六月飞雪: 가망 없는 일
태자비도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울면서 중얼거렸다.
“네가 아닌 걸 알아! 네가 아니라——”
그들은 결국 누구인지 말하지 못했다.
따뜻한 저녁 바람이 불어와, 이복귀의 눈물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후로 태자비는 다시는 ‘수 오라버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언젠가 태자가 술에 취했는지 이복귀를 붙잡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차라리 삿대질을 하면서 욕이라도 하면 좋겠다. 차라리 내가 나쁜 놈이라 여기고, 내가 바람둥이라 여기고, 내가 절 저버렸다 여기면 좋겠다.”
“그런데 보아라. 그녀는 모든 걸 알고 있어. 내가 말할 필요도 없이, 모든 걸 알고 있어.”
“나를 탓하지도 않아. 혼자 슬퍼할 뿐이지.”
“차라리 나를 탓했으면 좋겠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콜록거리면서 웃었다. 다음날 술이 깨면 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허 양제의 딸을 안고 꽃구경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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