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청청은 사매에게 책을 베끼게 하기 미안해서 혼자 백 번을 베껴야 했다. 그런데 시작도 하기 전에 강 황후가 손 첩여에게 금강경을 다섯 번 베껴 쓰며 마음을 가라앉히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극명한 수량 대비에 열받아서 붓 한 자루를 꺾어버렸다. 나중에 강 황후는 엽청청과 사매에게 보름 동안 순비 마마의 병간호를 하며 고생했다고 많은 상을 하사했다. 엽청청은 부종 가라앉히는 약을 사매보다 두 병 더 얻었다. 코끝이 찡해진 엽청청이 사매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가 황후 마마와 함께 지냈으면 좋았을 텐데.”
엽청청은 돈이 있으면 만사에 족했다. 얌전히 종이를 펴서 책을 베끼려는데, 종이를 다 펴기도 전에 뛰어 들어온 사매가 겁에 질려 이렇게 말했다. “청청, 어떡해! 황상이 어제 황후 마마를 꾸짖고, 손맷가마리를 소의로 승진시켰대…….”
그녀는 엽청청의 손을 흔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황상이 황후 마마를 싫어하게 되신 걸까? 손맷가마리가 황후가 되면 어떡해, 그럼 어떡해…….”
엽청청은 강 황후의 육황자와 칠황자가 모두 영리하고 황상도 중시하고 있으니 후위는 여전히 확고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매일 생글생글 웃으며 누구에게나 잘해주는 그 사람이 억울하지는 않을지 걱정되었을 뿐이다.
다시 미앙궁에 문안을 올리러 갔을 때, 강 황후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모두에게 해바라기 씨를 먹으라고 내주었지만, 자신은 말없이 윗자리에 앉아 자주 정신을 빼놓고 있었다. 그리고 손 소의는 사흘 내내 일부러 문안에 늦게 와서는 이런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주로 강 황후가 나이가 들어 미색을 잃었으니 보양에 주의하라는 말이었다.
주 미인의 말이 옳다. 황상은 손맷가마리 하나의 사람일 수 있지만, 황후 마마는 모두의 사람이다. 망할 것이 이렇게 제멋대로 설치는데, 강 황후야 상대하기 귀찮을지 모르겠지만 후궁의 다른 이들도 시체는 아니다. 오랫동안 나른하고 화기애애했던 미앙궁의 아침은 토론대회장으로 철저히 전락했다. 후궁에는 인재가 넘쳐난다. 이 여자들의 날카로운 말솜씨와 팽팽 돌아가는 머리는 엽청청을 무한히 감탄하게 만들었다. 손 소의가 매일 고개를 들라치면 누군가가 그녀를 내리눌렀다.
“마마께선 젊고 아름다우시니, 저희는 따라가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요. 하지만 마마께서 그토록 미모를 자랑스레 여기시는 것은 불로장생약이라도 드셔서 청춘을 영원히 지킬 수 있다 믿으시기 때문인가요?”
“쯧쯧쯧, 아우가 법도 이야기를 하니 이 형님이 우스갯소리가 하나 떠올랐네. 옛날에 어느 관리가 첩을 하나 들였는데, 이 첩이 매일 해가 세 발이나 뜨고서야 주모(主母)에게 문안을 올렸대. 얼굴까지 붉히면서 자기가 법도를 가장 잘 지킨다고 말했다나 뭐라나, 쯧쯧쯧, 웃겨 죽는 줄 알았어.”
“뭐가 안 웃기다는 거지? 덕비의 농담은 아주 웃겼어. 본궁도 우스갯소리가 하나 떠올랐다. 이전에 원숭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행인이 떨어뜨린 헌 모자를 쓰고는 제가 사람이 된 줄 알았대……. 손 소의는 뭘 조급해 하시는가. 본궁이 말한 건 원숭이야, 자네가 아니라.”
“귀비 마마께서 모르시는 소리 하십니다. 소의 마마의 성이 손씨 아닙니까. 그 원숭이의 성도 손씨*이니 조상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요.”
*손오공...
임 현비가 상황을 통제하지 않았더라면 손 소의는 산채로 분을 못 이겨 죽었을지도 모른다.
엽청청과 사매는 재밌게 연극을 구경했지만 신선 순비는 그런 범인들의 저급한 취미를 깔보았다. 설전이 점점 더 격렬해지자 순비 마마가 병을 고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주 미인은 몇 번이나 엽청청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청청, 너희 궁의 그 마마는 무슨 병이 있으신 거야? 한 달에 다섯 번은 병을 고하는데 한 번에 여섯 날은 앓으시잖아. 병이 중하신 거야? 그…… 그분 아직 숨은 쉴 수 있으셔?”
강 황후는 계속 울적했다. 황상은 한 달 동안 황후를 만나지 않았지만 별다른 처분을 내리지도 않았다. 강 황후가 총애를 잃은 형세가 확실해지자, 후궁의 여러 작은 단체들은 강 황후를 위로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을 조직했다. 주 미인은 간만에 머리를 감고 단장한 뒤 엽자패를 챙겼다. 그리고 엽청청과 주 보림을 끌고 가서 강 황후에게 놀이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결국 후궁 도박의 신 주 보림은 또 한 번 강 황후의 온갖 장신구를 털었다. 그를 본 현비가 웃으며 혼냈다. “자네들은 하나같이 점점 버릇이 없어져.”
강 황후는 자신의 썩어빠진 기술력에 우스워하며, 차고 있던 금팔찌를 주 보림에게 채워주고선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처럼 웃었다. “괜찮아. 문 꼭 닫아걸고 노는 거니까 괜찮다. 한 판 더 하자.”
주 숙비는 강 황후 옆에 앉아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손으로 이마를 쿡쿡 찔렀다. “계속할 거라고? 우리 마마는 배짱도 좋지. 나중에 미앙궁을 탕진하고 울지나 마라.”
강 황후는 주 숙비를 끌어당겨 애교를 부리면서 장신구 두 개를 다시 따오게 도와달라고 했다. 주씨 성은 전부 도박의 고수인가 보다. 주 숙비가 엽자패를 치고 주사위를 던지면, 강 황후의 장신구는 다시 그녀의 손으로 돌아갔다. 강 황후는 허리를 못 펼 정도로 웃어대며 장신구들을 가리켜댔다. “이거랑 이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니까 남겨두고, 나머지는 자네들에게 나눠줌세. 내가 답답해할까 봐 함께 있어 주어 고맙네.”
강 황후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엽청청과 친구들은 장신구를 한 벌씩 골랐다. 더 가져가기에는 정말 민망했다. 결국 강 황후는 미앙궁에서 식사를 대접했다. 돌아가는 길에 주 미인이 엽청청을 붙잡고 소곤거렸다. “난 왜 사내가 아닌 거야! 내가 사내였다면, 무조건 황후 마마에게 장가들었을 텐데!”
엽청청은 강 황후에게서 새로 받은 원앙과 해당이 조각된 백옥 비녀를 살살 어루만지며, 미앙궁의 강 황후와 다른 마마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생각해보다, 다시 평소처럼 고요한 화명궁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는 뻔뻔하게 순비 마마에게 사람들과 잘 어울려 보시라 권했지만, 순비 마마는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 처소가 싫으면 나가라.”
어쩜 이렇게 권고를 듣지 않는지! 엽청청은 자기 성격이 좋아도 너무 좋다고 감탄하면서 순비에게 납작 엎드렸다. “마마, 첩은 마마와 살면 제집에 사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첩이 어찌 싫어하겠어요. 첩은 그냥 마마께서 좀 여유롭게 지내셨으면 하는 것뿐이에요.”
순비는 정색하고 말을 하지 않았다. 엽청청은 용기 내어 다시 권했다. “마마, 궁에서 어떻게 살든 계속 살아야 하잖아요. 어째서 자신을 괴롭히세요? 첩이 보기에 황후 마마는 사람도 좋으시고 각 궁의 마마들도 서로 잘 지내니, 마마도 평소에 그분들이랑 이야기를 많이 나누시면 홀로 방 안에 있는 것보단 나으실 텐데요.”
그 말에 순비는 평소처럼 강 황후를 깎아내리는 대신, 고개만 숙이고 잠자코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이렇게 물었다. “폐폐, 말이 어쩜 그리 많아. 책 오십 번은 다 베껴 썼니? 다 베꼈으면 다시 오십 번 더 베껴라.”
손 소의는 결국 강 황후를 모함하다 실패해 냉궁에 보내졌고, 그렇게 궁에서 횡포 부리던 날들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그동안 황상이 총애하는 사람마다 제 무덤을 팠다. 사내들의 여인 보는 눈은 삐었다고들 하지만, 황상의 그 눈은 삐다 못해 저 멀리 검남까지 날아갈 지경이었다. 수많은 고통을 겪은 뒤 반성한 것인지, 황상은 삼 년마다 수녀를 선발하는 것은 백성을 혹사시키고 재물을 낭비하는 일이고 궁에는 이미 사람이 많으므로 앞으로는 별일 없으면 사람을 들이지 않겠다는 성지를 내렸다.
엽청청은 기뻐서 미칠 정도였다. 그녀는 순비 주위를 빙빙 돌며 폴짝폴짝 뛰었다. “마마! 궁에 새 사람을 들이지 않는대요! 남쪽에서도 사람을 보내지 못하게 됐어요! 우리도 안심하고 지낼 수 있어요!”
순비는 뛰어다니는 엽청청 때문에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그녀는 남화경으로 엽청청을 때리며 오백 번 베껴 쓰라고 했다. “폐폐, 머리가 나쁘면 책이라도 많이 베껴 쓰거라. 넌 내 아버지가 너랑 같은 줄 아니?”
후궁의 여인들은 다시 무해한 인간짐승의 모습을 되찾아, 자기에게 즐거운 일을 찾아다 주며 죽을 때까지 되는대로 사는 삶을 이어갔다. 언제나 남다른 순비 마마는 홀로 초조함의 광기에 빠져들었다. ——곧 사춘기에 진입하는 사내아이는 정말로 선녀를 억척스럽게 만들 수 있었다.
특히 삼황자처럼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교육받은 아이는.
공정하게 말하자면 황상은 확실히 이 아이에게 잘해주었다. 삼황자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황상은 궁전을 하나 선택해 학당으로 삼고, 재주로 온 천하에 이름을 떨친 강 황후의 셋째 숙부—— 홍문관 강 학사에게 직접 가르치도록 했다. 그 아래의 황자들도 나이가 들자 평범한 형제들처럼 함께 학당에 다녔다. 중궁 적출인 육황자도 특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삼황자가 나이가 많고 읽은 책도 더 많으니 황상이 좀 더 자세하게 시험하곤 했다.
요 몇 년 황상은 틈이 나면 황자들을 영안궁으로 불러 공부한 것을 물었고, 한 달에 두어 번 오는 화명궁에서도 삼황자를 불러 부자간에 책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었다. 후궁보다 조정을 사랑하는 황상이 이만큼 마음을 쓰는 것도 이미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세상 남자들의 대다수는 마음에 천하를 품고 매일 온갖 일을 처리해야 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소한 일을 어찌 천하와 한데 두고 논할 수 있겠는가? 엽청청의 아버지도 첩이 여럿 있었다. 그 아래 태어난 몇몇 서자 동생들이 학당에 가야 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엽청청의 아버지는 어리둥절해하며 이렇게 물었다. “언제 그렇게 컸지?”
순비는 오랫동안 두문불출했고, 자기도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삼황자를 곁에 묶어만 두었다. 그래서 이 소년은 만나본 사람도 많지 않고 어려서부터 수줍음을 탔다. 엽청청이 막 입궁했을 때 이 아이는 기둥을 껴안고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가 움츠러들고, 또 고개를 내밀었다 움츠러들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서야 작은 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마…… 마마, 안녕하세요.” 엽청청이 시선을 돌렸을 때는 이미 몸을 돌려 저 멀리 달아난 뒤였다.
삼황자는 학당에 간 뒤로 달라졌다. 아이는 마음을 고요히 하고 책을 열심히 읽었다. 황상이 화명궁에 오면 삼황자는 수줍어하며 말을 많이 하지는 못해도, 시험하는 말에 얼른 몸을 곧게 펴고 책을 외웠다. 눈도 평소보다 더 초롱초롱 빛났다. 옆에서 보는 엽청청도 무척 기뻐했다. 황상도 삼황자가 책을 열심히 읽는다며 순비에게 칭찬했다. “강 경이 며칠 전에 셋째를 여러 번 칭찬했다. 글씨를 잘 익혔고 책도 열심히 외운다면서 말이야. 네가 잘 가르친 게로구나.”
황상이 남양후를 아무리 기탄한다고 해도, 아이를 가르치는 일마저 가식을 꾸며낼 정도는 아니라고 엽청청은 생각했다. 황상은 삼황자를 시험할 때 지난번에 틀린 구절을 기억했다가 다시 묻기도 했다. 이런 모습도 가식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는 진심으로 아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하지만 순비는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인지, 아직도 옛일에 갇혀 있는 것인지, 황상이 삼황자를 칭찬하고 떠나면 아이를 한바탕 때리며 욕을 퍼부었다. 혼내는 말도 늘 거기서 거기였다.
“네가 뭔데! 겨우 두어 구절 읽은 것이면서 그걸로 자랑하느냐!”
“똑똑히 들어라. 사람은 자신을 알 수 있기에 귀하다 했다(人贵有自知之明). 네게 무슨 원대한 뜻 같은 게 있다면 내 미리 말해두마. 그 마음은 하루빨리 접는 게 좋을 거다!”
“물은 고요하고 깊게 흐르고 지혜로운 자는 과묵하다 했다. 입으로 말만 잘하면 총명한 사람인 줄 아느냐? 지난번 네 부황 앞에서 입을 놀리던 멍청이의 무덤에 풀이 석 자나 자랐다!”
“내 이 평생 네게 큰 걸 바라지 않았다. 책을 읽으려면 읽어라. 다음에 또 네 부황 앞에서 입을 놀릴 거면, 여기서 나가 다른 어미를 찾아보거라!”
이렇게 퍼부어지는 욕설에 삼황자는 말할 것도 없고 엽청청까지도 멍한 얼굴을 했다. 순비는 욕을 마치면 아이에게 벌을 내렸다. 손바닥을 때리거나 무릎 꿇고 있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멀쩡하던 아이는 놀라서 겁을 먹고 황상 앞에서도 점점 더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황상이 몇 번이나 공부한 것을 시험했는데, 순비 마마가 그쪽으로 힐끗 쳐다보기만 하면 삼황자는 입을 벌리고도 대답하지 못했다.
삼황자는 점점 위축되고 글씨도 점점 보기 흉해졌다. 공부를 시험해도 대답하지 못하자 황상은 이해할 수가 없어, 몇 번이나 터놓고 이야기해 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이리저리 물어보아도 결국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나중에 또 한 번 일이 터졌다. ——삼황자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사황자와 오황자도 입학했다. 개구쟁이 오황자가 뛰어다니다가 어느 날 삼황자와 부딪혔는데, 삼황자의 품에서 빠져나온 책 중 한 권에 오두(五蠹)라는 두 글자가 분명하게 쓰여 있었다.
한비자의 학설은 당연히 경전이었지만, 아마 삼황자 같은 나이의 아이들에게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삼황자는 시경이나 논어도 반도 외우지 못해 강 학사가 고생하며 설명해주고 있었다. 황자들이 배우는 것은 모두 유가의 경전인데, 삼황자는 몰래 ‘유학자들은 문(文)으로 법치를 어지럽히고, 협객들은 무(武)로 율법을 어긴다. 그러나 군주는 예로서 이를 대해야 하니 이것이 나라가 혼란해지는 근원이다.(儒以文乱法,侠以武犯禁,而人主兼礼之,此所以乱也)’ 같은 말을 읽고 있었다. 늘 조심하고 신중한 강 학사는 이를 황상에게 보고했다.
황상이 성을 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화명궁에 와, 삼황자와 순비 앞에서 이 책을 태우고 삼황자의 반독(伴读)을 바꾸었으며, 시위 둘을 때려죽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두 해 동안 네가 많은 책을 외우지 못하기에 짐이 근심하고 있었는데, 인제 보니 역시 책을 좋아하는구나. 짐도 마음에 든다. 하지만 독서란 차례대로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선생이 네게 가르친 성인의 말씀은 여전히 엉망으로 배워놓고 이런 책을 읽어 정신을 흐트러뜨리면 독서가 오히려 해가 된다. 이런 책을 읽고 싶거든, 네가 자라서 무엇이 충성과 효도이고 무엇이 절개와 의리인지 알게 된 후에 다시 생각해보자.”
엽청청은 황상이 ‘충성과 효도, 절개와 의리’ 이 네 단어에 특히 힘을 주어 말했다고 느껴졌다.
황상은 삼황자에게 논어를 오십 번 베껴 쓰는 벌을 내리고, 한 달 동안 학당에 가지 말고 반성하라고 했다. 그리고 순비 마마는 직접 채찍을 들고 아이를 때리더니 밥도 주지 않고 남화경을 오십 번 베껴 쓰라고 했다.
우습게도 삼황자는 황장자로서 아버지는 그에게 유가 경전을 배우고 군주에게 충성하여 나라에 보답하는 도리를 깨우치라 했고, 어머니는 그에게 노자와 장자의 도를 배워 청정한 무위(無爲)의 도를 깨달으라 했다. 그런데 아이는 하필이면 둘 다 좋아하지 않았고, 제가 관심 있는 것은 제왕의 도였다.
그건 결코 제멋대로 관심을 가져도 되는 것이 아니다.
화가 난 순비는 미친 암사자 같았다. 아들을 다 때린 뒤에는 궁인을 때렸다. 삼황자 곁의 사람들은 전부 얻어맞고 갈아치워졌다. 그래서 무고한 엽청청과 사매도 화가 난 순비에게 무차별적인 질책을 들어야 했다. “너희가 왜 궁에 들어왔는지 내 잘 알고 있으니 얌전하게 굴어라! 내 아들을 잘못된 길로 빠뜨리려 들면 마찬가지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억울한 사매는 뒤에서 몰래 울었고, 그때부터 자동으로 삼황자와 오 미터는 떨어져서 멀리서 인사만 하고 도망쳤다.
순비는 삼황자에게 남화경을 읽으라고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삼황자는 무슨 연고인지, 외우지 못하는 건 둘째치고 책을 보고 읽을 때조차 글자를 틀리게 읽었다. 마음이 급해진 순비는 아이를 욕하는 데 경중이 없었다. 삼황자는 고개를 숙이고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자 관계는 몇 년이 지나며 일촉즉발의 지경으로 나빠졌다. 어느 날 순비가 한숨을 쉬며 엽청청에게 말했다. “예전에는 저 녀석이 평안하게 태어날 수만 있다면 내 이생에 여한이 없으리라 여겼는데, 가르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 어찌 알았겠느냐!”
엽청청은 그녀의 태양혈을 주물러주며 백 번째 설득을 시작했다. “삼황자는 나날이 자라고 있잖습니까. 마마께서 삼황자에게 터놓고 분명하게 말씀해주시면 좀 더 수월할지도요.”
순비는 눈을 감고 침묵하다 한참이 지나서 탄식했다. “폐폐, 모든 일이 네 말처럼 쉬웠으면 얼마나 좋았겠니.”
엽청청은 궁에서 오래도록 허송세월하며 어떤 일들을 점차 분명히 알게 되었다. 순비가 삼황자를 가르치는 데 있어 어려운 점은 그녀가 궁에서 지내는 데 있어 어려운 점과 같았다. 남양후의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삼황자라는 기성(旣成)의 패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삼황자는 동생들보다 몇 살이나 많다. 삼황자가 우수해서 황상의 마음에 들었다면, 남양후는 당시 황상을 옹립했던 것처럼 삼황자를 옹립할 것이다. ——외손자가 점점 멀어지는 외조카보다는 더 가까운 법이니. 이런 외조부의 부추김에다 황상의 칭찬 몇 마디까지 더해지면 삼황자는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황상이 그에게 더 많은 것을 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황상이 주려 했다면 애초에 왜 강 황후처럼 어린 소녀를 황후로 세웠겠는가?
순비의 심사는 줄곧 단순했다. 그녀는 이 아이가 황상의 마음과 칭찬을 얻는 것이 꼭 좋은 일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우직하게 분수를 지키고 기꺼이 자신을 결백하게 지키며, 남쪽에서 무슨 소란을 일으키든 그들 모자가 상관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럼 살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첫째로는 그녀의 교육 수단이 너무 난폭했고, 둘째로는 아이가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가 무얼 좋아하고 무얼 원하는지는 부모가 통제할 수 없다…….
“셋째로는, 남쪽 역시 본궁의 말이 통하는 곳이 아니라는 거지.”
순비는 엽청청이 용감하게 꺼낸 이 세밀한 분석을 듣다가, 지친 듯이 이렇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 오두 책이 어디서 났겠느냐. 어쨌든 강영류의 셋째 숙부가 주었을 리는 없잖아.”
“폐폐, 몇 년 동안 너도 나름대로 발전했구나.”
“저 녀석은 어려서부터 겉으로만 얌전한 체하고 뒤로는 딴마음을 품었어. 이젠 저만큼 컸으니 어떨지 모르겠다만. 난 저 애 주변의 사람들을 바꿀 순 있어도 제 발로 밖으로 나가려는 걸 막을 순 없다.”
엽청청은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이 마치 나무를 타고 오르는 자신을 보던 어머니의 모습과 아주 닮았다고 느껴졌다. 미간의 응어리에는 한 여인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의 의의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했다.
“마마…… 아니면 황상께 말씀드려보세요. 황상께서 삼황자를 좀 더 바짝 지켜봐달라고요…….”
순비는 지쳐서 백안을 뒤집지도 못했다. “방금 발전했다고 칭찬했더니——. 그럼 내 아비를 황상에게 대놓고 팔아넘기는 것 아니냐? 덧붙여서 황상에게 이 아이가 분수를 모른다고 알려줄 뿐이지.”
“한 가족, 이게 바로 한 가족이야!” 순비의 아름다운 눈은 멀어버린 듯했다. 그녀는 자조했다. “한 집안의 골육이기에 이렇게 서로를 해치는 것이다!”
“예전에 아버지가 꿈에 고모님이 자주 나타나 황상을 잘 돌봐달라며 당부했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그런 꿈을 꾸시는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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