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북쪽의 정세가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설이 지나 황상은 군대를 북상시켜 북적과 전쟁을 시작했다. 남양후는 성지를 받들어 ‘공위경사’가 되어 도성으로 돌아왔다. 황상은 특별히 궁에서 연회를 베풀고, 남양후에게 화명궁으로 가 순비와 이야기할 시간도 주었다.
장장 십 년이 지나서 만나게 된 남양후도 늙어 있었다. 용맹한 기운은 여전했지만, 더욱 냉담하고 엄숙해져 있었다. 본래 그는 빈한한 집안 출신으로, 누이가 궁녀로 들어가며 얻은 열다섯 냥 은자 덕에 길거리에서 굶어 죽지 않았다. 나중에 군에 들어가 기회와 인연을 얻어 윗사람의 눈에 들었고, 그때부터 글과 병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늘 점잔빼고 거드름 피우기를 싫어하여, 항상 큰소리로 웃으며 부하 병사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이제는 스무 해 동안 보지 못한 딸을 마주하고 단정히 앉아 말끝마다 마마라고 불렀다.
“……이번에 급히 상경하느라 집안 여인들이 함께 오지 않은 탓에 마마께 인사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마마의 두 형제는 부름을 받지 못해 사사로이 입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판에 박힌 태도로 집안 형편을 늘어놓았다. 순비는 도중에 이야기를 끊고 아버지에게 다가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아버지, 이십 년 동안 진진이 그립지 않으셨어요?”
부녀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남양후가 손을 뻗어 순비의 뺨을 꼬집어 보려다, 손이 얼굴에 닿자마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를 보며 가볍게 탄식했다. “진진, 키가 좀 더 자란 게 아니냐?”
순비는 웃음을 지으려다 눈물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남양후의 손을 잡고 조용히 물었다. “아버지…… 아버지……, 아직도 꿈에서 어머니를 보세요?”
이 광경에 엽청청은 눈물을 흘리다 말고 갑자기 웃고 싶어졌다. 그녀도 아버지를 마주 보고 묻고 싶었다. 아버지, 저 그동안 살도 찌고 머리도 벗겨졌는데 알아보시겠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남양후를 따라 상경은 했어도 부름을 받지 못해 궁문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이생에 골육이 다시 모일 날은 없을 테니 이 눈물은 스스로에게 남겨두는 편이 낫다.
남양후는 무슨 일이 생각났는지, 등을 돌려 딸을 쳐다보지 않았다. 순비도 강요하지 않고, 그저 혼자 질문을 계속했다. “이전에 아버지께서 싸우러 나가시면 저는 작은 뜰에 있는 녹나무 가지에 앉아 아버지를 기다렸죠. 아직 기억하세요?”
“아버지는 싸우러 나가지 않으시면 술을 마셨어요. 그러다 취하면 제게 어머니 이야기, 큰고모님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권법도 보여주셨죠. 아버지, 기억하세요?”
“아버지는 전에 제가 우는 모습을 두고 보지 못하겠다 하셨지요. 제가 울면 어머니가 꿈에서도 말을 안 한다면서요. 아버지는 아직도 어머니 꿈을 꾸세요?”
남양후처럼 큰 뜻을 품은 사람이 딸이 꺼내놓는 옛일 이야기를 듣는다고 뉘우치고 후회할 수 있다면 관중들에게 미안한 일일 것이다. 순비가 눈물을 글썽이며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후야는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진진, 삼황자도 곧 장가갈 나이가 되었는데 넌 어찌 아직도 이렇게 잘 우는 것이냐?”
그가 돌아서서 순비를 바라보았다. “아비가 네 어머니를 잃고 개처럼 밤새 장안에서 도망쳤던 날도 이렇게 흐리고 비가 내렸다.” 그는 이미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했다. 지난 일을 말하니 음험함을 억누르지 못했다. “나중에 네 큰고모가 죽임을 당했을 때 아비는 목숨을 걸고 밤새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도적처럼 아수를 한 번 훔쳐보고 나왔지. 그때도 비가 내렸어.”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결국 손을 뻗어 딸의 볼을 꼬집었다. “아비도 쉰다섯이다. 대장부가 일생에 도모하는 것이 없을 수 없다. 일을 도모하는 건 사람이지만, 성사시키는 건 하늘이라 했지. 시작한 이상 끝까지 가보아야 하는 게다. 돌아가는 길로는 가지 않을 거야.”
“네 어머니가 날 탓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떠나기 전에 엽청청을 차갑게 쳐다보았다. “네 가족은 다 잘 지낸다. 궁에서 마마를 정성껏 모시느라 수고가 많다.”
순비는 남양후와 그렇게 만난 뒤에도 여전히 매일 남화경을 읊었다. 하지만 심리적 소양이 부족한 엽청청은 다시는 이전처럼 엽자패를 칠 수 없었다. 주 미인이 그녀를 보러 오기도 했다. “청청, 요즘은 왜 놀러 오지 않아? 너무 심하게 져서 돈이 한 푼도 안 남았니? 정 안 되겠으면 내가 빌려줄게! 그게 무슨 별일이라고!”
엽청청은 그녀에게 말할 수 없었다. 언니, 난 돈이 없는 게 아니라 곧 목숨이 달아날 거예요!
한 해가 넘게 이어지던 북쪽의 전쟁이 막을 내렸다. 군대가 조정으로 돌아오기 전날 밤, 황상은 황자들과 조정 대신들과 함께 성을 나가 친히 삼군(三軍)의 장병들을 맞이하고, 가는 김에 도성 근교의 병영을 순시하겠다는 성지를 내렸다. 삼황자는 사람을 보내 병을 고했다. 여름 더위가 심해 그저께 과일빙수를 많이 먹었다가 설사가 심하다며, 어쨌든 어가를 따라나서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삼황자는 열다섯이었고, 아직 왕부를 세우지 않아 화명궁 후전(后殿)에서 지내고 있었다. 황상이 직접 살피러 왔을 때, 삼황자는 입술도 하얗게 질려 있었고,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베개에 엎드려 떨면서 횡설수설하며 사죄했다. 황상은 태의가 삼황자의 병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조급해하거나 화를 내지도 않고, 슬퍼하거나 기뻐하지도 않았다. 그저 다 듣고 난 뒤에 삼황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들아, 내일 정말로 짐을 따라나서지 못하겠느냐?”
삼황자는 한참을 사죄하고서야 그렇다고 대답했다. 황상은 그를 보면서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오랜 침묵 뒤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다면, 궁에서 잘 쉬고 있어라.”
화명궁 전전(前殿)으로 돌아온 황상은 숙비와 말없이 마주 앉았다. 엽청청은 순비 아랫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순비가 ‘황상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시리즈의 마지막 질문을 하는 것을 들었다. “예기(礼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함은 타고난 천성이다. 황상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황상은 그녀를 보고 싶지 않은 듯 눈을 감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그는 몸을 일으켜 순비를 내려다보았다. “자식이 충효를 알면 천륜을 다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가르침을 듣지 않고 예법을 지키지 않는데 아비가 사랑하더라도 어찌하겠는가.”
그렇게 말하고는 가볍게 웃었다. 황상이 돌아서서 떠나려 할 때, 순비가 일어서더니 허리를 굽혀 절을 올렸다. “첩이 알아들었나이다. 황상을 배웅합니다.”
엽청청은 그렇게 오랫동안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막상 일이 닥치니 여전히 긴장되었다. 그녀는 순비의 소매를 붙잡고 바들바들 떨며 물었다. “마마, 황상, 황상의 말씀이 무슨 뜻이에요?”
순비는 간만에 부드럽게 그녀의 손등을 토닥였다. “폐폐, 저들이 움직이려나 보다.”
엽청청은 덜덜 떨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마마, 그럼 우린 어떡해요. 황상, 황상께서 알게 되신 걸까요? 아니면 후야께 말씀드려서…….”
“황상이 알든 모르든 그들은 움직일 수밖에 없다.” 순비의 평온한 목소리는 이 여름날 밤에 서늘한 침착함을 띠고 있었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도마에 오른 물고기처럼 황상의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지.”
엽청청은 밤새도록 울었다. 그녀는 겨우 스물다섯이고, 곧 죽을 것이다.
새벽에 그녀는 몰래 비녀 두 개와 서신 하나를 나무상자에 넣었다. 서신의 대략적인 내용은, 황후 마마께서 자비를 베풀어 비녀를 주 미인과 주 보림에게 하나씩 주고 궁에서 십 년을 함께하며 쌓은 정분에 대한 기념으로 삼을 수 있게 해 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이 물건을 자신이 죽기 전에 강 황후에게 넘겨야 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순비가 사람을 보내와 그녀를 정전(正殿)으로 불렀다.
삼황자의 얼굴에서 병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친어머니에게 여전히 공손했다. “소자와 외조부가 만사를 안배했으니, 모비께서는 궁중에 편히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상황을 잘 모르던 사매는 엽청청의 손을 끌어당기면서도 입을 열어 묻지는 못했다. 순비는 곧게 앉아 사람을 똑바로 바라볼 때도 위엄이 있었다. 질문도 아주 전문적이었다. “강 황후 쪽은 어찌할 셈이냐?”
삼황자는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연약한 여인들이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사람을 시켜 지켜보게 하면 되지요. 일이 성사된 뒤에 다시 처리할 겁니다.”
이렇게 믿는 구석이 있어 당돌한 모습을 보고 순비는 고개를 기울이며 또 백안을 뜰 뻔했다. 그녀가 냉소를 연발했다. “연약한 여인? 숙비 주씨는 어려서부터 부형을 따라 무예를 익혔다. 요서에서는 사내로 가장해 협객 노릇을 하며 사방에서 불공평한 일을 보아넘기지 않았어. 현비 임씨는 책략가다. 당시 허가 사람들이 현비의 방에 몰래 주술 인형을 들여놓았는데도 그녀는 아무 위험에도 처하지 않고 온전히 보전했지. 그들이 연약한 여인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이느냐?”
삼황자는 친어머니에게 기세를 빼앗겨 말을 잇지 못했다. 순비는 그를 한참 바라보더니 희비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큰일을 도모하려면 모든 일에 세심해야 한다. 작은 것 하나 놓쳐서는 안 돼. 됐다, 네가 결국은 내 아들이지.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내가 대신 그들을 지켜보도록 하마.”
삼황자는 속으로 엽청청만큼이나 놀라서 ‘내가 잘못 들었나’ 하는 눈으로 한참 쳐다보더니 결국 일어나 절을 올렸다. “모비께서 소자를 위해 나서주신다니 감사드립니다. 그럼 모비께 폐를 끼치겠습니다.”
다음날이 거사일인데 사매는 여전히 멍한 채 이렇게 물었다. “만약 일이 성사되면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엽청청은 이 가능성에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준준아……”하고 탄식하며 그녀의 나무상자를 베개 밑에 쑤셔 넣었다.
밤에 순비가 특별히 엽청청을 초대해 함께 술을 마셨다. 여름날이 무더운데 순비가 좌우까지 물려서 엽청청은 제 머리에 땀을 이고 순비에게 부채질을 해주어야 했다. 그녀는 부채질을 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마마, 저들이 하는 일을 우리가 막을 수 없으니 내버려 두면 그만인데, 왜 굳이 이 일을 맡으셨어요?”
오늘 밤 순비는 성격이 좋았다. 백안을 뜨지도 않고 코웃음을 치지도 않으며 천천히 설명해주었다. “첫째로는 내 아버지의 군기가 괜찮긴 하지만 아무도 지켜보지 않았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이 궁의 사람들을 아무도 좋아하지 않긴 하지만, 그들에게 빚지는 건 더 싫어. 둘째로는……”
순비는 말을 잇지 않고 술을 한 잔씩 따랐다. 두 사람이 죽엽청 반 주전자를 마신 뒤에야 그녀는 가벼운 말투로 이렇게 물었다. “폐폐, 애초에 내가 잘못한 게 아닐까?”
“장천을 심운요에게 주어야 했던 게 아닐까?”
술을 마신 그녀의 두 뺨은 붉었고, 두 눈은 심궁의 마른 우물처럼 고요했다. “심운요는 나보다 아이를 잘 가르쳤어. 장천이 심운요를 따랐다면 분명 즐겁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그 애가 내 아들이 아니고, 내게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도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텐데.”
엽청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순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순비는 피하지 않고 그저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내가 애를 잘 가르치지 못했어. 난 어려서부터 고집불통이었고, 급해지면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 나도 어머니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몰랐다. 내가 그 앨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거야.”
“이 일은 성사되지 않을 거다. 황상은 그 애를 살려두지 않을 거야. 어미 된 나도 그 앨 위해 딱히 해준 일이 없었으니, 황천 가는 길이라도 함께해주려는 게지.”
엽청청은 엉엉 울었다.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순비가 그녀의 팔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럴 것 없다, 폐폐, 그럴 것 없어……. 나도 좋은 사람은 아니야. 허선방의 딸은 내가 해친 것이다.”
“난 허선방이 정말 무서웠어. 내 두 아이를 허선방의 손에 잃었지. 장천이 막 태어났을 때, 너무 작아서 난 그 애 팔을 부러뜨릴까 봐 늘 조심했다. 허선방은 냉궁에 있었어. 호국공을 상대하기 위해 살려둔 것이었겠지……. 하지만 난 무서웠어. 죽지 않는 한 못 할 짓이 없는 사람이었거든. 그리고 내 두 아이의 원한도 남아 있었지. 그 빚을 황상이 받아내 주지 않겠다면 나라도 받아내야 했어! 난 그가 날 도와주길 기다렸는데!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어!”
“허선방의 아이가 앓기 시작했을 때 나는 태의의 약을 바꿨다. 왜 내 아이는 죽어야 하고 그 아이는 살 수 있는데? 허선방에겐 그 딸 하나뿐이었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보물이었지. 그 애가 죽자 그녀도 살아갈 수 없었어.”
“폐폐, 내가 이 손으로 너덧 살 먹은 어린애를 죽였다…….”
“내가 한 짓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거야. 난 허선방에게 완전히 눌려서 몇 년이나 괴롭힘을 당했으니까……. 하지만 황상은 분명 알았겠지. 그는 모든 일을 알고 있어. 말하지 않을 뿐이지.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 심운요의 딸이 죽었어. 난 몰랐다고 나 자신을 위로했지만, 그녀의 막내아들은 확실히 나 때문에 목숨을 잃은 거야.”
“폐폐, 내가 무섭지 않니?”
“겁낼 것 없다. 이 류보진은 은원이 분명한 사람이니까. 그 아이를 죽인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난 남에게 빚지고 싶지 않지만, 내게 빚진 것을 아무도 돌려주지 않겠다면 나는 반드시 내 손으로라도 돌려받아야 해!”
“손에 피를 묻혔지만 후회하지 않아!”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목에서 쉰 소리로 이 몇 마디 말을 짜내고는, 고개를 들고 또 한 잔을 마셨다. 눈가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난 그래도 심운요에게 빚을 졌어. 그 사람을 가장 싫어했는데, 하필이면 그 사람에게 빚을 졌어…….”
엽청청은 순비의 어깨를 토닥이며 울먹임을 참고 말했다. “마마, 지나간 일은 생각하지 마세요.”
순비는 대답 없이 눈을 감고 긴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엽청청에게 술을 따라주고 그녀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청청, 너를 기억해.”
“어렸을 때 귀엽고 포동포동했지. 내 동생들은 다 나를 피하는데 넌 나와 한참 이야기를 했어. 그때 널 기억한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엽청청의 볼을 꼬집었다. “처음 회임했을 때 사내아이라면 그 애 아버지를 닮길 바랐고, 계집아이라면 난…… 너 같은 아이였으면 했어.”
그녀는 엽청청의 입가에 술잔을 들이밀며 마시라고 했다. 이미 많이 마신 탓인지 엽청청은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흐릿했다. 순비가 웃는 모습만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나는 사람 사귀는데 서투르고, 그걸 딱히 신경 쓰지도 않아……. 그런데 넌 항상 내게 잘해주었지. 고맙게 생각한다. 내게 친구라고는 너 하나뿐이야…….”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자작(自酌)했다. 엽청청은 머리가 멍했다. 잠들기 직전에 이 생각만이 머리를 스쳤다. 마마, 원래 제가 잘해드린 거 알고 계셨군요! 정말이지 사람이 모반을 앞두면 말도 선량해진다니까.
엽청청이 깨어났을 때 날은 이미 밝아 있었다. 그녀는 오랏줄에 꽁꽁 묶여 순비의 침전 구석에 던져져 있었고, 옆에는 마찬가지로 쫑즈(粽子)처럼 묶인 채 입도 틀어막혀 ‘오오오’ 거리는 사매가 있었다.
순비는 그녀들을 등지고 화장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두운 무늬로 수를 놓은 넓은 소매의 흰 류선군(留仙裙)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비선계(飞仙髻)로 틀어 올렸다. 반란을 꾀하는 게 아니라 우화등선하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썹을 다 그린 뒤 엽청청 앞으로 다가갔다. 엽청청은 그녀가 무얼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발버둥 치지도 않고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순비는 그녀의 뺨을 살짝 꼬집으며 아주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청청, 울지 마라. 무서워하지도 마. 기억해, 넌 아무것도 모르는 거다. 내가 너흴 포박해두었다고, 너흰 아무것도 모른다고, 우리 모자가 반란을 꾀한 일을 알고 강 황후에게 알리려다 내게 붙잡힌 거라고 해.”
사매가 흐릿한 울음소리를 냈다. 엽청청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눈을 뜨고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순비가 다시 그녀의 뺨을 꼬집으며 말했다. “잘 기억해두어라. 넌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그리고는 돌아서서 한 걸음 한 걸음 밖으로 향했다. 침전을 나서기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를 연루시켜 미안하다.”
엽청청은 바닥에 얼굴을 댄 채 소리 없이 그 자리에서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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