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이렇게 쓸모없으니 남쪽에서는 당연히 조바심을 냈다. 수녀 선발이 다가오자 사매가 초조해하며 말했다. “검남 쪽에서 또 사람을 보내겠대! 쓸모없어졌다고 우릴 버리려는 게 아닐까?”
엽청청은 한참을 생각했지만, 그들이 어떻게 더 쓸모없어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지금 궁에서 총애를 받고 있길 하니, 지위가 있길 하니? 아매, 우린 아무것도 없는데 뭘 어떻게 버려?”
“몰라. 우리를 화명궁에서 지내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들여보내는 거 아니야?”
“그건 좋은 일 아니니? 너 어제도 순비 마마의 말씀이 듣기 싫다고 했잖아? 어느 궁에서 살든 엽자패 놀이를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사매는 그 말에 어리둥절해하다 한참 만에 대꾸했다. “하지만, 그럼 앞으로 순비 마마께서 나서시더라도 우리를 돌봐주지는 않으실 거야. 후야께서 우리 아버지를 난처하게 할지도 모르고.”
엽청청은 순비 마마의 전용 백안(白眼) 뜨기를 따라 하면서 ‘멍청한 범인 같으니, 꺼져’라는 눈빛도 같이 날려 주려고 했다. 그러다 목이 꺾여서 눈알도 제대로 굴리지 못하고, 결국 목을 문지르며 설명해 줄 수밖에 없었다.
“위에 그렇게 많은 마마가 계시는데 넌 순비 마마가 어떻게 나서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나서긴 뭘 나서? 네 눈엔 순비 마마가 나서고 싶어 하시는 걸로 보이니? 그분은 출가(出家)하고 싶은 거야! 후야께서도 네가 쓸모없다고 네 아버지를 난처하게 하진 않으실 거야. 그분의 도량에 대해선 믿음을 가져도 돼.”
이 말을 사매가 제대로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검남에서 올라온 수녀들이 다 떨어지자 사매는 긴 숨을 내쉬었다. 순비가 모처럼 그들을 불러 함께 저녁을 들면서, 모처럼 사매에게 한 마디를 더했다. “어이, 누구랬더라, 아무튼 가만히 좀 있으라고 전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살짝 기울이고 눈꺼풀을 치켜올렸다. 살짝 뜬 백안은 정말로 우아하고 적절했다. 제가 한 일을 순비가 모를 것이라 여겼던 사매는 깜짝 놀라 ‘마마’만 부르며 한참을 부들부들 떨고서야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요?”
순비 마마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엽청청이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다시는 밖으로 소식을 전하지 마. 밖에서 온 소식에 답하지도 말고.”
순비는 엽청청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매에게 말했다. “멍청한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등급이 나뉘는구나.”
순비 마마가 ‘멍청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서 엽청청은 일찌감치 익숙해졌다. 이 마마의 눈에 온 궁을 통틀어도 똑똑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주 숙비와 임 현비는 그녀와 같은 동궁의 옛사람이고 십여 년의 정을 나눈 셈인데, 순비 마마는 그들을 만날 때도 고개만 살짝 끄덕일 뿐이고 미소조차 지어주기 귀찮아했다. 나중에 들어와 윗자리에 오른 강 황후에게는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절을 올릴 때의 그 아주 미세한 몸짓은 절을 안 올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그렇더라도 강 황후는 못 본 것처럼 온종일 생글생글 웃었다.
“똑똑한 사람이지.” 강 황후가 칠황자를 낳던 날 밤, 순비 마마는 남화경을 읽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비스듬히 입꼬리를 휘고 상징적인 백안을 뜨고서 그렇게 말하자, 엽청청은 그 ‘똑똑하다’는 말이 ‘멍청하다’보다 더 나쁘게 들렸다. “재롱부리고 얌전한 체한 덕에 성과를 얻었어.”
엽청청은 순비 대신 먹을 갈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다 벼루에 먹을 떨어뜨려 온몸에 먹물이 튀었다. 그러나 순비 마마가 모처럼 드러낸 그 작은 원한이 소문에 고팠던 엽청청의 눈에 불을 지폈다. 엽청청은 먹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얼른 순비의 침상 곁으로 달려가 다리를 껴안고 물었다. “마마, 강 황후가 누구한테 얌전한 체를 하는데요오오오오?”
순비가 손에 들고 있던 책으로 엽청청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러면서도 진귀한 두어 마디를 내려주었다. “넌 얼마나 멍청한 거니? 누구한테 얌전한 체를 해야 아들을 낳을 수 있겠어?”
황상 말인가? 엽청청은 순간 실망했다. 마마, 이 궁에서 누가 황상의 비위를 맞추지 않겠어요? 마마야말로 황상의 비위를 안 맞춰서 이렇게 살고 계신 거잖아요! 마마가 직업정신 없이 황상의 비위를 안 맞추는 바람에, 검남에서도 최고 인기 상품이었던 이 엽가 큰아가씨가 황상이 놀려두는 여인으로 전락해서 매일같이 어느 날 황상이 미니멀 라이프*를 마음먹는 건 아닌지 걱정할 지경이 되었잖아요!
*断舍离: 인터넷 용어라서 이렇게 썼는데, 일본 단샤리를 한자 그대로 옮긴 거임. 불필요하고 부적절하고 오래된 물건들을 다 버리고 미련을 끊은 뒤에야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할 수 있다 어쩌고...
순비 마마는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관심 없었다. 그저 흥, 냉소를 지으며 책을 또 엽청청의 머리 위로 내리쳤다. “아무리 똑같이 따라 해도 같은 건 아니지.”
얻어맞은 엽청청의 눈에 별이 돌았다. 그래도 순비를 껴안은 팔은 절대로 풀지 않고 끈질기게 따져 물었다. “마마, 누굴 따라 해요? 강 황후가 누굴 따라 하는데요오오오오?”
순비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요 몇 년 엽청청이 줄곧 곁을 지키며 그녀에게 아주 약간의 인간미를 키워준 것인지, 엽청청이 호기심에 시달려 죽게 둘 생각은 없는 듯 책장을 몇 번 넘긴 뒤에 대답해주었다. “황상이 새로 총애한다는 사람을 보면 알 거다.”
황상이 새로 총애하는 사람은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작은 궁녀로, 성은 심씨였다. 엽청청이 사람을 깔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궁녀는 늘 위축되어 있고 말도 모기처럼 들리지도 않게 했다. 엽청청 자신보다 못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매일 머리도 안 감고 단장도 안 하는 주 미인만도 못했다! 오죽하면 미앙궁에 문안을 올리러 갔을 때 주 미인이 비밀스럽게 이런 말을 했을까. “황상께서 국사에 너무 바빠 눈이 멀어버리신 게 아닌가 싶어. 내가 황상이었다면 매일 황후 마마를 껴안고 손에서 놓지도 않았을 텐데. 게다가 이런 사람을…….” 주 미인은 착한 아가씨라 입만 삐죽 내밀고는 듣기에 안 좋은 말은 하지 않았다.
엽청청은 열흘 가까이 심 소의를 자세히 관찰했다. 매일 아침 미안궁에 문안을 가서도 훔쳐보는 변태처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려고 노력했다. 눈을 부릅뜨고 있느라 눈물까지 줄줄 흘려서 사람 좋은 강 황후가 태의를 불러 눈병이 있는지 진찰하도록 하기도 했다. 태의가 약을 발라줄 때까지도 엽청청은 여전히 그 심 소의에게 도대체 무슨 특별한 점이 있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순비 마마의 백안을 마주할 각오를 하고 뻔뻔스럽게 물었다. “마마, 첩이 멍청하지요. 정말 정말 너무 멍청합니다. 그런데 그 심 소의요…… 도대체 어떤 점이 특별한 거예요?”
순비는 백안을 뜨는 것조차 귀찮은 듯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남쪽에 새가 있는데 그 이름은 원추(鹓鶵)라 한다. 그대는 알고 있는가? 그 원추는 남해에서 북해로 날아가야 한다. 오동나무가 아니면 머물지 않고, 대나무의 과실이 아니면 먹지 않고, 달콤한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한다…….”*
《장자-혜자상량(庄子-惠子相梁)》
이어지는 대목: 이때 부엉이가 썩은 쥐 한 마리를 주웠는데, 새가 그 앞을 지나가자 부엉이가 고개를 들고 쳐다보더니 성난 소리로 겁을 주었다. 지금 그대도 그대의 양나라를 이용해 나를 겁주려는 것인가?
-혜자: 혜시(惠施). 전국시대 송나라 사람으로 장자의 벗 / 상량: 양나라의 재상이 되다
-원추는 고대 전설 속 봉황과 같은 새로, 고결한 습성을 가지고 있음. 오동나무, 대나무의 과실, 달콤한 샘물 등은 지향을 비유함.
-부엉이는 공명과 봉록을 추구하는 사람, 썩은 쥐는 공명과 봉록을 비유함.
-장자는 원추에 자신을 비유해 자기가 원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고 공명과 봉록 같은 것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줌. 그리고 혜자를 부엉이에 빗대어 공명과 봉록에 심취하여 의를 잊고 주견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함.
그 대목을 읽고 읽다가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묻듯 되뇌었다. “그 이름은 원추라 한다. 그대는 알고 있는가? 그대는 알고 있는가? 그대는 알고 있는가?”
엽청청은 그녀의 눈물에 깜짝 놀라 얼른 내빼려 했다. 그런데 순비 마마가 처음으로 그녀를 멍청하다고 욕하지 않으며 이렇게 말했다. “심 소의가 냉궁의 그 사람과 똑같이 봉황안을 가지고 있지 않더냐?”
심 소의는 항상 고개를 숙이고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해서 그녀의 눈을 살펴보기는 아주 힘들었다. 엽청청은 목을 기우뚱하고 며칠을 보고 나서야 발견했다. 아이고, 정말로 봉황안이네. 냉궁의 미쳐버린 요비와 똑같다. 예전에 사매는 요비의 눈이 아주 예쁘다면서, 하필이면 늘 목을 기우뚱 기울이고 요염한 눈빛을 하고 있어 속되다고, 잘생긴 눈이 그 속된 눈빛에 망가졌다고 말했었다.
의외네요, 순비 마마! 매일 눈만 가늘게 뜨고 도 닦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니! 하지만 그렇게 자세히 보는 게 무슨 소용인가. 봉황안을 가지고 새로 태어나지도 못하는데! 그런데 다시 강 황후를 보니, 황후 마마는 분명히 초롱초롱한 행인안(杏仁眼)을 가지고 있었다. 황후 마마가 도대체 누구의 무엇을 따라 한다는 거지!
강 황후는 자신이 해산할 때 황상을 꼬여낸 심 소의의 겁에 질린 얼굴과 우물쭈물한 말투도 아주 인내심 있게 대했다. 어느 날 미앙궁에 문안 올리러 갔는데, 심 소의 곁의 고고가 총애받는 주인의 기세를 믿고 시비를 걸었다. 펑펑 울면서 금하궁의 송 첩여가 제 웃전에게 불경하게 굴며 절도 법도에 맞게 올리지 않는다면서, 황후 마마에게 공정한 처분을 내려달라고 했다. 강 황후는 상석에 단정히 앉아 웃음 띤 얼굴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최고 우수 후궁 대변인 임 현비가 즉시 나섰다.
“심 소의 곁의 사람이 이렇게 주인을 보호하는 것도 진귀한 충심이군. 다만 마마 앞에서 이렇게 실례를 저지르다니, 심 소의는 단속을 잘해야 할 것이네.”
심 소의의 얼굴에는 당황이 가득했고, 눈에는 두려움이 쓰여 있었다. 그녀는 얼른 무릎을 꿇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마마…… 살려주십시오…….”
그녀는 그렇게 두서없이 용서를 빌었고, 자리에 모인 후궁들은 일제히 백안을 떴다. 주 미인이 팔꿈치로 엽청청의 갈비뼈를 쿡쿡 찔러 하마터면 내상을 입을 뻔했지만 주 미인은 별생각 없이 곁눈질만 했다. “청청 봐봐! 지능에 문제가 있나 봐!”
강 황후는 차마 보고만 있지는 못하겠는지, 손을 뻗어 현비의 소매를 잡아당기더니 곁의 시녀에게 심 소의를 부축해 데려오도록 했다. 그리고는 아이 달래듯 심 소의의 등을 토닥이며 물었다. “겁내지 말게. 그러니까, 송 첩여와 무슨 오해가 있었던 건가?”
심 소의가 얼른 아니라고 대답했다. 강 황후는 생글거리며 심 소의에게 해바라기 씨 한 줌을 주었다. “그럼 저 고고가 헛소리를 한 게로군! 매일같이 자네 궁에서 호통치고 자네를 가르치려 든다며? 우리 고고를 바꿈세, 어떤가?”
심 소의가 해바라기 씨를 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안 현비는 처참하게 울부짖는 고고의 입을 막고 밖으로 데려가게 했다. 그리고 심 소의에게 상의국의 경험 풍부하고 이력이 뛰어나고 주인을 왕성하게 한다는 고고 다섯을 추천해, 마음대로 하나 뽑게 했다.
엽청청은 다시 한번 감탄했다. 왜 저보다 한 살밖에 안 많은 사람이 모의천하가 될 수 있었는지 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 기개, 이 능력! 순비 마마도 잘 좀 배워 보세요! 남의 눈만 쳐다보고 계시지 말고!
그러나 심 소의가 총애를 받은 지 며칠도 안 되어 막 회임했고, 새로운 수녀들이 입궁했다. 그중에 양씨 성의 여자아이는 활발하고 잘 웃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궁의 새 사람 옛사람 할 것 없이 잘 어울렸다. 황상은 모처럼 모두와 심미가 일치하여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더니, 처음에 미인으로 봉했다가 곧 양비로 승진시켜 주었다. 순비 마마와 같은 급이 된 셈이다. 순비 마마가 잘 되어 따라 승천하기만을 바라고 있던 사매의 정신은 철저하게 붕괴되었다.
“마마, 이것 좀 보세요, 좀 보시라고요! 마마의 직분을 다 하세요! 입궁한 지 열흘 좀 넘은 사람이 입궁한 지 십여 년은 된 마마와 대등하게 되었는데, 마마는 괴롭지도 않으세요? 마마 자신은 생각하지 않더라도 후야 생각은 하셔야죠. 후야가 저 멀리 검남에서도 마마를 위해 전심으로 방법을 강구하고 계시는데 마마도 협조를 하셔야죠! 황상께서 오늘 저녁에 오신다니 우리 열심히 해 봅시다, 네? 오늘은 황상과 대화를 잘 좀 나눠 보셔요. 매번 엉뚱한 질문만 하지 마시고요!”
순비 마마의 좋은 점이 여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녀는 사매의 실례를 지적하지도 않았다. 여전히 속눈썹을 치켜올리며 은근한 백안을 뜨고, ‘허’ 한마디 내뱉더니 말했다. “정말이지 작은 멍청이(蠢蠢)구나. 나도 네 멍청함 덕분에 웃는다.”
그로부터 순비 마마는 사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엽청청이 사매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며, 준준(蠢蠢)이라 부르게 했다.
순비는 당연히 사매의 신경질적인 충고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황상이 명화궁에 왔을 때도 여전히 자기식 그대로였다. 삼황자 이야기도, 자기 이야기도 하지 않고, 멀리 검남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고, 황상의 기거에 대해서는 더욱 관심이 없었다. 황상이 물었다. “전날 또 병을 고했다던데, 어디 불편한 것이냐? 태의는 불렀고?”
순비 마마는 아무 동요 없는 얼굴을 하고 동문서답했다. “인위적으로 자연을 멸하지 말고 고의적으로 자연의 본성을 멸하지 말고, 허명(虚名)을 얻기 위해 여력을 다 써버리지 말라. 신중히 자연의 본성을 지키고 상실하지 않는 것을 본심(本真)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한다.* 이 말을 황상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庄子-秋水(장자-추수)》: 无以人灭天,无以故灭命,无以得殉名。谨守而勿失,是谓反其真。
훌륭하다. 이건 엽청청이 명화궁에 들어온 지 삼 년이 지나는 동안 순비가 황상에게 던진 ‘황상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시리즈의 스물일곱 번째 질문이었다.
황상은 이 사촌누이에게 정말 너그러웠다. 아마 습관이 된 것인지, 귀찮아하지도 않고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웃었다. “이것도 은자(隐者)의 말씀이라! 짐은 은자가 아니라 일국의 군주다. 군주의 도리로서 주인에게는 오옹*이 있음을 잊어선 안 되지.”
*五壅: 군주가 다섯 가지 속임을 당하면 그 권세를 잃게 된다. 신하가 주군의 눈을 막고 기만하는 것, 신하가 재물을 통제하는 것, 신하가 독단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 신하가 사사로이 남에게 이익을 주는 것, 신하가 당파를 키우는 것을 오옹이라 한다. -《한비자·주도(韩非子·主道)》
주인에게는 오옹이 있다니, 무슨 오옹이지? 엽청청은 잘 몰랐다. 이틀 후 삼황자와 순비와 함께 식사하다가 별생각 없이 물었는데, 삼황자가 대답할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얼른 끼어들었다. “엽 마마는 오옹을 모르세요? 오옹이라는 말은 한비자에서 나왔습니다. 군주는 다섯 가지 기만을 당할 수 있음을 이릅니다. 신하가 군주의 눈을 가리면 군주는 제위를 잃을 것이고, 신하가 재물을 통제하면 군주는 은덕(恩德)을 잃을 것이고, 신하가 사사로이 남에게 이익을 주면 군주는 영명함을 잃을 것이고, 신하가 당파를 키우면 군주는 자신의 사람을 잃는다는 거지요.”
예닐곱 살 된 어린아이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이렇게 유창하게 말하자 엽청청은 박수를 치려고 했다. 그런데 순비 마마가 낯빛을 뒤집더니 탁자를 내려치며 욕을 퍼부었다. “이 축생 놈이! 언제 이런 책을 읽은 것이냐?”
삼황자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고 일어서서 더듬더듬 대답했다. “선생…… 선생이 가르쳤습니다.”
순비 마마는 아이의 뺨을 후려쳤다. 엽청청이 막을 새도 없었다. 불쌍한 삼황자는 맞고도 감히 울지 못하고 얌전히 고개를 숙인 채 훈계를 들었다. “네가 뭔데 네 부황이 네게 군주의 도리를 가르치라 하겠느냐? 내가 바보인 줄 아느냐!”
순비 마마는 삼황자를 한바탕 때리고는 밤새도록 접시를 이고 무릎 꿇게 했다. 엽청청이 말리지 않았다면 아이를 매달아 놓고 때렸을 수도 있다. 삼황자는 울지 못했지만 엽청청은 삼황자를 안고 울었다. “마마, 삼황자께서 아무리 잘못했대도 나이가 어리잖습니까. 마마께서 천천히 가르치시면 분명 이해할 겁니다.”
순비 마마는 냉소만 지었다. “나이가 어려? 내 보기엔 야심이 대단하기만 하다! 무모하고 멍청한 것!”
그 일을 겪은 뒤 삼황자는 더욱 말이 없어졌다. 엽청청은 순비가 늘 남을 멍청하다고 욕하지만, 본인이야말로 정말 똑똑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다 생각을 해 보니, 순비는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없었고 후야는 늘 공무로 바빴으며 후원의 희첩들은 이 큰아가씨에게 잘 보이려고만 했다. 그녀가 아이 가르치는 법을 모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며칠 뒤 엽청청이 순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마, 저희는 멍청이라서 많은 일들을 마마보다 잘 모르는 게 당연해요. 그러니 마마께서 저희에게 좀 더 분명히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도 어떻게 해야 마마의 화를 돋우지 않을지 알아두면 좋지 않을까요?
순비는 백안도 뜨지 않고 금족하고 남화경을 오십 번 베껴 쓰라는 벌을 내렸다. 엽청청이 다 베껴 쓰기도 전에 양비 쪽에서 일이 터졌다.
양비에게 일이 난 건 전적으로 친정 때문이었다. 오라비가 누이를 해치고 아버지가 딸을 해쳤다. 친정 식구들은 양비가 총애받는 것에 기대어 행패를 부렸고, 그녀 자신도 어리석어서 궁 밖으로 몇 번이나 말을 전했다. 양가가 탐한 은자에는 그녀의 몫도 있었다. 그런데 엽청청은 군왕의 마음이 이렇게나 헤아리기 어려운 것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황상은 책장 뒤집듯 낯을 바꾸고는 사람을 산채로 때려죽였다. 더 무시무시한 것은, 그분이 명화궁 사람도 참관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는 것이다!
궁정사(宫正司)가 비빈의 절반을 에워싸고 있었다. 사비 중에서는 현비 마마만 왔고, 강 황후는 없었다. 임 현비는 순비 마마를 보고도 태연자약하게 자리를 권했다. 막 팔황자를 낳은 심 소의는 고개를 숙이고 벌벌 떨고 있었다. 순비 마마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임 현비에게 물었다. “태중에 아이가 있다던데?”
임 현비의 목소리는 아주 냉혹했다. “황상께는 이미 황자 여섯과 공주 셋이 있지.”
…… 그러니까 하나가 많든 적든 다르지 않다는 건가요, 마마? 아이라고요, 아이! 배추가 아니라!
엽청청은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황상도 모진 말은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와서도 별말이 없었다. 현비 마마는 직책을 다하여 모두에게 죄명과 처분을 읊어주었다. 양씨는 궁 밖과 사사로이 소식을 주고받고 가족의 부패를 방임하고 민간 여자를 강탈해 인명을 상하게 한 일을 눈감아 주었으니, 궁의 규율(宫规)에 따라 장폐(杖毙)에 처한다. 육궁은 이를 경계로 삼아 몸을 깨끗이 하기를 바란다.
강 황후가 급하게 사람을 구하러 달려왔다. 몹시 놀란 것 같았다. 황후는 황상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황상, 양씨의 죄를 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용종을 품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황상은 강 황후를 볼 때와, 그녀들, 그리고 순비 마마를 볼 때가 달랐다. 황상은 황후를 부드럽게 끌어당겨 품에 가두고는 엽청청의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눈살을 찌푸렸다. “짐이 저들에게 너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특별히 일러두었는데 어찌 온 것이야? 대단한 일도 아닌데. 장념을 낳고 몸이 허약해졌으니 너는 몸조리만 잘하면 된다.” 엽청청은 왠지 모르게 황상의 그 매 같은 눈동자가 한순간 저를 스치고 지나간 기분이 들었다. 잘못 보았나 싶어 다시 보니 황상은 이미 손으로 강 황후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용종을 품고 있는 자가 아니라 황자와 공주를 양육하고 있는 자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무법천지로 날뛰면 남겨둘 수 없어.”
총애가 극에 달했던 양비는 그렇게 사라졌다. 엽청청이 순비를 부축해 화명궁으로 돌아왔을 때, 순비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날 밤 순비 마마는 열이 올랐다. 다른 사람은 열이 오르면 머리가 어지러워지는데, 그녀는 열이 오를수록 눈이 맑아지고 말이 많아졌다. 다른 사람들은 다 쫓아내고 엽청청과 사매만 남기더니 이렇게 말했다. “황상이 오늘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불러 참관하게 한지 아느냐?”
사매는 낮에 너무 놀라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수룩하고 대담한 엽청청은 떨리는 목소리로도 대답했다. “살, 살계경후요.”*
*杀鸡儆猴: 닭을 죽여서 (그 피를 뽑아) 원숭이에게 보이다. 한 사람을 벌하여 다른 사람을 경고(위협)하다. (네이버 사전)
순비 마마는 화가 나서 멍청한 것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누가 살계경후인 걸 모르느냐! 내가 물은 건, 누가 그 원숭이냐는 것이다!”
엽청청은 벼락을 맞은 듯 말이 없어졌다.
순비 마마는 베개에 엎드려 폐가 찢어질 듯 기침을 했다. “나다! 나! 내가 그 원숭이야! 내가 그 원숭이라고!” 그녀는 기침을 하며 이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러더니 사매의 손목을 붙잡고 호통쳤다. “봤느냐? 네가 감히 계속 남쪽 사람들과 제 무덤을 판다면, 황상이 아니라 내가 직접 널 때려죽일 것이다!”
사매는 결국 개처럼 왕—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화명궁은 두 사람이 한꺼번에 쓰러져 태의를 부르고 탕약을 끓여댔다. 엽청청은 한편으론 병중에 성질이 백배는 더 나빠진 순비의 시중을 들며, 다른 한편으론 황상에게 놀란 건지 순비에게 놀란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겁을 잔뜩 집어먹은 사매를 위로해야 했다. 왼쪽에서는 “넌 정말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고 오른쪽에선 “나 너무 무서워” 소리를 들으며, 엽청청은 처음으로 자신이 정말 강인한 여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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