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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장류 宫墙柳

번외. 엽 보림(叶宝林) -1

by 小曜 2023. 7. 20.

 

 

엽청청(叶青青)이 궁에 들어온 지 사 년째 되던 해에 궁에서 또다시 새 수녀 선발이 시작되었다.

 

강 황후는 후덕한 사람이었다. 다른 후궁들이 불편해할까 봐 문안 올리는 시간에도 다정한 말을 많이 해 주었고, 궁마다 후하게 상을 내렸다. 미앙궁에서 나오며 주(朱) 미인이 엽청청에게 속삭였다. “황상께서 수녀를 몇 번 더 선발하시면 좋겠다.”

 

엽 청청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사월의 봄날, 궁에는 꾀꼬리가 울고 버드나무가 푸르렀다. 그녀는 화명궁(和明宫)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입궁 전 규방 밖에 심었던 목련 나무가 생각났다. 올해는 꽃이 얼마나 피었을지 모르겠다.

 

엽청청은 장안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검남(剑南)에서 왔다. 검남에서 도성까지는 길이 멀다. 어머니는 그녀를 배웅하는 길에 목이 쉬도록 계속 울었다. 첫날 저녁에는 아버지와 싸우기도 했다. “왜 꼭 청청을 보내야 하느냐고요. 청청이 무얼 안다고. 이렇게 보내면 내 평생에 저 애를 다시 볼 날이 오긴 하겠어요?”

 

아버지는 오히려 자신만만했다. “청청이 황상과 순비 마마를 잘 모시면 좋은 날은 올 거요. 부녀자가 무얼 안다고 함부로 말하는 게요. 게다가 궁에 계신 순비 마마가 예전에 우리 청청을 얼마나 좋아하셨소. 후야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으니 절대 푸대접하진 않을 거요.”

 

엽청청은 제 아버지의 머리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순비 마마가 입궁하던 때에 그녀는 고작 다섯 살이었다. 십일 년이 지났다. 마마께서 알아보지 못할 지경일 수도 있는데, 돌봐줄지 푸대접할지를 논할 것이 무어란 말인가. 어머니도 무척 못마땅해했다. “내 딸에게 그렇게 큰 복이 있으리라고는 바라지도 않아요. 보살님께서 청청의 목숨을 지켜주기만 하셔도 감지덕지할 거라고요. 그곳이 어느 곳인데…….”

 

어머니의 성심이 하늘을 감동시켰는지 모르겠지만, 엽청청은 입궁하자마자 화명궁에서 지내게 되었고, 그 뒤로 몇 년 동안 꽤 잘 살았다. 화명궁의 주인이 바로 순비 마마였다. 순비 마마는 입궁하기 전에는 그래도 인간미가 조금 있었는데, 지금은 온몸에 선기(仙气)만 흘렀다. 매일 시를 쓰고 참선하느라 바빠서 엽청청 같은 범인(凡人)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녀와 함께 화명궁에 사는 사매(谢梅)가 이렇게 슬쩍 속삭였다. “청청, 우리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면 순비 마마가 우화등선하시는 건 아닐까?”

 

사매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검남에서 왔다. 두 사람은 함께 입궁했고 마찬가지로 두세 번 시침을 들었다. 황상은 그녀들을 딱히 온화하게 대하지도, 딱히 엄하게 대하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그리고가 없었다. 어쨌든 황상에겐 돈이 있었다. 그녀들은 화명궁에서 미리 노후 생활을 시작했다. 막 입궁해서 보림으로 봉해졌는데, 삼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보림이었다. 그녀가 어제 순비 마마의 머리를 빗길 때 마마가 진실을 이야기했다. “너희 같은 애들은 보림이 된 것도 이미 나쁘지 않은 셈이다.”

 

사매는 화가 나서 눈시울을 붉히더니, 문을 나서자마자 엽청청에게 속삭였다. “나쁘지 않은 셈이 무슨 말이야? 처음에 후야께서 우리 아버지한테 뭐라고 하셨는데? 입궁해서 순비 마마를 도우라고 했잖아, 그런데 마마는? 당신이 쓸모없는 건 그렇다 쳐, 그런데 우리가 나서지도 못하게 하시잖아. 마마께서 우리에게 좀 더 신경 쓰고 밀어주셨다면 아직도 고작 보림이겠어?”

 

엽청청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순비 마마의 말은 늘 듣기에 좋지 않았다. 도를 오래 닦으면 인지상정이나 속세의 일을 점점 더 이해할 수 없게 되어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후궁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강 황후는 온화하고 자애롭고, 임 현비는 공정하고 너그럽고, 정 덕비는 명쾌하고 시원시원하고, 주 숙비는 정중하고 겸허하고, 온 귀비는 가끔 사람 놀랄 소리를 하긴 하지만 난꽃처럼 고상하고 사람을 우애롭게 대했다. 순비 마마가 이 사람들과 후위(后位)를 다투다니, 질 게 뻔한 경쟁이었다.

 

엽청청과 사매가 만 리 길도 마다치 않고 궁에 들어온 것은 바로 ‘천한 강씨’에게 순비 마마의 후위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이 일은 말하자면 이야기가 길다. 엽청청의 아버지의 가장 높은 상관인 남양후부터 시작하자.

 

검남의 어느 주현(州縣)에서든 “남양후가 오신다”고 외치면 집집마다 남녀노소 모두 거리로 뛰쳐나와, 검남 제일 남신의 풍채를 구경하려고 자리를 다투었다. 검남 사내들이 말하는 남양후는 호탕하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대장부이고, 검남 여인들이 말하는 남양후는 준수한 풍채를 가진 ‘류랑(刘郎)’으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잘생겨진다 했다. 검남 노인들은 당시 소년 영웅이던 후야가 육조를 몰아내고 백성들을 재앙에서 구했다 했고, 흙인형을 사는 아이들도 보마(宝马)를 타고 방천화극(方天画戟)을 휘두르는 후야를 달라고 했다.

 

엽청청의 아버지는 열여섯에 남양후의 휘하에서 전장을 누볐다. 엽청청의 어머니네 온 식구들은 남양후가 육조 오랑캐의 칼 아래에서 구해낸 백성들이었다. 두 부부는 남양후의 광적인 호구팬(脑残粉)이었고, 엽청청이 어릴 때부터 남양후가 전쟁에 나가면 얼마나 지략이 풍부하고 얼마나 용맹하고 잘 싸우는지 이야기해주었다. 엽청청은 시사가부는 못 외워도, 남양후가 모년 모월에 어디에서 무슨 전투를 어느 군을 써서 치렀는지는 입만 열면 줄줄 읊을 수 있었다.

 

그녀가 다섯 살이 되던 해, 남양후가 엽가의 연회에 참석했었다. 그녀는 병풍 뒤에 숨어서 머리만 쏙 내밀고 훔쳐보았다. 남양후가 그걸 보더니 긴 팔을 뻗어 그녀를 안아 올렸다. “엽가 자네 집 딸도 참 예쁘게 생겼군. 통통한 것이 복이 많겠어!”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겪어온 건장하고 우람한 사람이었는데, 용모는 책을 많이 읽은 귀공자처럼 고상했다. 얼굴은 아버지보다 희고, 눈은 아버지보다 크고, 웃으면 콧수염도 아버지보다 훨씬 잘생겼다.

 

나중에 엽청청은 친구들과 싸울 때면 항상 이 말을 들먹였다. “난 후야께서 직접 예쁘다고 칭찬해주셨거든! 그런 넌 뭔데!”

 

남양후는 준수하고 남양후의 딸도 준수했다. 후부 큰아가씨의 아명은 보진(宝珍)으로, 후야는 ‘우리 집 보진’을 입에 달고 다녔다. 다들 큰아가씨가 얼마나 학식이 깊고 아름다운지, 꼭 하늘의 선녀 같다며, 얼마나 훌륭한 사내여야 큰아가씨에게 어울릴지 모르겠다고들 했다.

 

이 보진 아가씨에 대해서 엽청청은 들은 이야기가 많았다. 보진 아가씨의 어머니는 도성의 귀한 댁 딸로 부모의 허락 없이 후야와 사통했다고도 하고, 그 귀한 댁 따님은 나라를 망친 허 사태와 인화태후 허씨 집안의 딸인데 허가와 후야는 불공대천의 원수가 있다고, 후야는 허가의 화를 입어 어쩔 수 없이 검남으로 와 입대한 거라고도 했다. 또 누군가는 그 아가씨가 후야에게 딸을 낳아준 뒤 자진했다고도 했고, 또 누군가는 후야가 검남에서 육조와 일 년 동안 싸워 장군이 되었는데 막 승리를 거두어 진영으로 돌아왔을 때 한 노파가 어린 아기를 그의 손에 넘겨주는 것을 보았다고도 했다.

 

그렇게 많은 누군가의 말 중, 마지막 이야기만 엽청청의 아버지가 직접 본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뜬금없는 풍문이라 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후야는 희첩을 무수히 들이고 자녀도 줄줄이 낳았지만, 정실부인은 하나도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이야기꾼들이 아주 많은 이야기를 지어내기에는 충분했다. 검남 사람들은 설서 선생이 ‘남양후가 홀로 말을 타고 적을 죽이다’ 이야기를 하면 손뼉 치며 쾌재를 불렀고, ‘박복한 이가 한탄하며 명주(明珠)를 부탁하니, 남양후가 눈물로 어린 딸을 가르치다’ 이야기를 하면 인화태후를 욕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남양후의 사위가 되려고 앞다퉈 나섰지만, 후야는 하나같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가 상경하여 후작에 봉해진 뒤 돌아오더니, 기쁨에 차서 딸의 혼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늘의 선녀가 범계의 소년에게 가당키나 하겠는가. 선녀는 태자야(太子爷)께 시집가 마마가 되실 분이다.

 

큰아가씨가 도성으로 떠나기 전에 남양후는 큰 연회를 열었다. 엽청청은 부모님을 따라갔다. 그 신선 같은 아가씨는 말을 금처럼 아끼며 입을 열지 않았다. 나른하게 자리에 앉아, 알랑거리고 찬미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녀는 교만한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고개만 살짝 숙였다. ‘너희가 뭐라고 하는지 나는 안 들리는구나’ 식이었다.

 

그가 바로 남양후부의 큰아가씨이다. 남이 뭐라고 하는지도 관심 없고, 그녀가 관심 없다는 걸 남이 알아차리든 말든 역시 관심 없는 신선 언니였다.

 

신선 언니가 엽청청에게 제 옆에 앉으라며 큰 은혜를 베풀었다. “엽씨라고? 네 아버지가 내 아버지 대신 칼을 막았었지.”

 

그녀가 손을 뻗어 엽청청의 볼을 꼬집었다. 너무 아팠지만 선녀 언니한테 꼬집히는 것이니 참을 수 있었다! 엽청청은 아픔을 참고 물었다. “언니, 도성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려요?”

 

그녀는 반대쪽 손으로 바꾸어 엽청청의 볼을 꼬집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몰라. 안 물어봤어. 오래 걸리겠지.”

 

엽청청은 다시 물었다. “혼자 그렇게 멀리 가는데 언니는 안 무서워요?”

 

“뭐가 무서워? 아버지가 도성엔 내 사촌 오라버니가 있다고 했어.”

 

엽청청은 숭배심이 생겨났다. 신선 언니는 정말 대단하구나, 도성에 사촌 오라버니도 있어! 나처럼 검남에만 사촌 오라버니가 있는 게 아니라!

 

집으로 돌아갈 때 엽청청은 어머니 품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어머니는 손으로 엽청청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사내들이란! 어쩜 그리 마음이 독해요. 검남이 도성에서 이렇게 먼데, 후야는 아가씨를 그 멀고 위험한 데로 보내기가 아쉽지도 않대요? 검남에도 좋은 사내들이 있는데 굳이 장안까지 갈 건 뭐냐고요. 동궁에 들어갈 수 있는 게 대단한 복이라고들 하지만, 난 그런 복 받기 싫네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세상 물정 모름을 비웃었다. “부녀자가 무얼 안다고. 상대는 태자가 아니라 후야의 외조카란 말이오! 친척끼리 더 친해지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소? 태자가 등극하면 황후 마마 자리를 제 집안 사촌누이에게 주지 않을 수 있겠소? 우리 후야께선 나라의 장인이 되실 뿐만 아니라 황제의 외할아버지도 될 수 있을 거요. 다시는 허가에 눌려서 억울하게 살지 않으셔도 되는 거지!”

 

오 년 후, 남양후의 조카가 황제가 된 건 사실이지만, 황후 마마의 성은 심씨였지 류씨가 아니었다. 엽청청의 아버지는 집에서 문을 닫고 몰래 욕을 했다. “우리 후야께서 돈도 내주고 사람도 내주셨건만 후위를 다른 사람에게 주다니, 퉤, 내가 다 억울하다.”

 

어머니는 몇 년 새 성장해서 이성적인 팬이 되었다. “심 황후는 원래 정실이었잖아요. 순서라는 게 있는데.”

 

바로 이때 갑자기 집에서 선생을 모시고 엽청청에게 금기서화와 예절과 단장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엽청청은 남들과 말다툼하기를 좋아하던 소녀였는데, 몇 년 배우고 나자 꽤 그럴듯했다. 일거수일투족부터 웃는 얼굴까지 정성껏 훈련된, 법도에 맞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남양후는 그녀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도 엽가 자네 딸을 보고 내가 예쁘다고 했었지. 시간이 나면 조정의 일에 대해서도 딸에게 좀 얘기를 해 주게. 나는 시간이 없어 진진에게 그런 이야기를 못 해 줬더니……. 내가 어리석었지. 한 가족인 줄 알았지 뭔가.”

 

그렇게 말하며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하지 않자 아버지가 타일렀다. “후야, 조급해 마십시오. 마마께는 삼황자가 있지 않습니까. 심 황후는 아들들도 다 죽었고 몸도 안 좋다던데요. 우리에겐 시간이 있습니다…….”

 

남양후는 여전히 음흉한 표정이었다. “내 딸을 녀석에게 시집보낸 건 이런 억울함을 당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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