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라고 하면 사실 궁중에는 순비의 삼황자와 요숙의의 오공주도 있다. 하지만 순비 이 사람은 정말 신기하게도 누구와도 왕래하지 않았다.
“순비도 여상한 인물은 아니야. 허 양제와 함께 동궁에 들어왔지. 나와 현비보다 조금 더 일렀어. 황상이 초왕이던 시절에는 곁에 요요밖에 없었어. 태자가 된 뒤에 우리 넷을 차례로 들였지.” 날이 조금 쌀쌀해서 방에 숯을 피웠지만 그래도 추웠다. 숙비 마마가 새로 볶은 해바라기 씨는 엄청 맛있었다. 우리 둘과 온 귀비는 의자 세 개를 모아놓고 두꺼운 이불을 깔고 담요를 덮은 채 반쯤 누워서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며 한담을 나누었다.
“순비는 황상의 사촌 누이야. 황상의 친어머니는 일찍 죽었지. 선황의 후궁은 이렇게 태평하지 않았어. 인화태후 일가가 조정을 장악했고, 다른 세력을 용납하지 않았어. 황상의 친어머니도 인화태후의 손에 죽은 거야. 조정과 후궁이 한 몸이던 시절이었지. 조정이 불안하니 후궁도 평탄하지 못했다. 황제놈은 사내로선 역겨운 인간이지만, 황상 노릇은 입 댈 데가 없지. 조정을 깔끔하게 정리했잖아. 후궁이 딴맘을 품어도 버팀목이 없으니 저절로 심하게 날뛸 수 없게 되었어. 일이 생겨도 작은 소란에 불과하고, 큰일을 벌이진 못해. 선황 시절의 후궁은 그야말로 전쟁터였지. 난 황상을 싫어하지만, 궁에서의 생활이 그리 괴롭지는 않아.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확실히 일가견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겠지.”
온 귀비와 나는 안달이 났다. 누가 황상 얘기를 듣고 싶댔냐고요? 우리는 해바라기 씨 껍데기를 숙비에게 던졌다. “순비 얘기를 해달라고!”
숙비가 허허 웃으며 눈을 감고 죽은 척했다. 우리 둘은 그녀에게 달려들고 싶었지만, 담요가 아쉬워 시끄럽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얼른 순비 얘기 해달라고요——”
“순비 얘기 해줘——”
“순비~~~~~~~!!”
순비가 화명궁(和明宫)에서 재채기를 했을까? 태의를 부를 지경이었을지도 모른다.
“황상은 적자가 아니고 친어머니는 일찍 죽었어. 도리로 따지면 황위를 바닥에 내던져도 그의 차례가 돌아올 일은 없었지. 하지만 철면피에다가 속이 시커먼 인간이잖아. 어머니를 죽인 원한은 저편에 놓아두고, 유부남의 몸으로 허선방을 꼬드겼어. 퉤, 진짜 뭐 하는 인간이야? 뻔뻔하기도 하지. 요요가 눈이 멀었지, 그렇게 일편단심이었다니. 요서에서 이런 작자는 진작에 맞아 죽었어…….”
숙비 마마는 반나절을 황상 욕을 하고서야 본론으로 돌아갔다. “허선방은 허가의 금지옥엽이었지. 인화태후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게? 듣자 하니 선제의 왕 수의가 인화태후의 손에 죽었는데, 회임 중이었던지라 그렇게 두 목숨이 날아갔대. 수의의 언니가 인화태후의 사람이었다던데, 무슨 방법을 썼는지 나중에 태후의 아이 둘을 죽였다더라. 허가의 가세가 대단하니 인화 그 못된 할망구가 비빈을 해치고 황자를 죽이는 건 대단한 일도 아니었어. 다 자업자득이지, 흥. 선제가 붕어했을 때 인화태후가 심히 상심해서 병사했다고 하는데, 난 절대로 안 믿어. 황상이 손을 쓴 게 분명해. 황제놈 인내심도 대단하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황상이 허선방을 꼬드겼다고. 그 얼굴에 연기까지 더해졌어. 속셈을 품고 제대로 꼴값을 떠는 데다, 허선방은 방비도 안 되어 있었으니 당연히 넘어갔지. 두 사람이 식초 냄새 풀풀 풍기는 불순한 시를 얼마나 많이 주고받았는지 알아? 허선방은 그걸 죽을 때까지도 옷깃에 품고 있었어……. 처음에 허가에서는 반대했지. 선황의 열두 아들 중에 누가 초왕을 안단 말이야? 그들은 선태자를 눈독 들이고 있었어. 선태자의 어머니는 허가에서 들여보낸 사람이었어. 아들은 남기고 어미는 죽여버리고……. 하지만 인화태후는 자기 아이가 죽은 뒤로 허선방을 엄청 아꼈어. 허선방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 마음 아파했지. 마침 그때 선태자가 멍청한 짓을 저지른 거야. 생모의 일을 어떻게 알았던 건지, 몰래 제사를 지내다가 들켜서 인화 할망구의 속을 뒤집어 놓았어.”
“황제놈은 운도 좋지. 허 태사(太师)가 죽은 틈을 잘 탔거든. 허가는 전부 노태사(老太师)에게 의지하는 형편이었고, 그 아래 자제들은 전부 무능했다. 황자들은 그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어. 그렇게 선택지가 하나둘씩 줄어들고 결국 남은 건 초왕뿐이었어. 어떤 일은 사람이 시작하지만, 성공 여부는 하늘에 달린 법이라고, 허 태사가 살아있었다면 지금 황위에 앉은 사람이 누가 되었을지는 몰라……. 황제놈은 그렇게 태자가 됐어. ——책봉되는 날에 허선방을 태자 양제로 들였다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하늘과 조상에게 절하는 모습이 딱 정식 부부 같았다던데. 그러니 요요라는 태자비가 있다는 걸 누가 기억이나 하겠어? 심 노승상이 만만한 상대였다면, 인화 할망구는 요요를 내치라고 황제놈을 몰아붙였을 거야.”
“허가의 압박을 받던 선황은 아들마저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어. 그래서 순비와 나를 황제놈에게 맺어준 거야. 우리 두 집안은 나름대로 힘이 있으니까. 우리 집안은 요서 주둔군이 있고, 순비는, 남양후가 남강(南疆)에서 군공을 세운 데다 황제놈의 외숙이기도 하니까. 황제놈 친어머니는 친정의 세력이 약했기 때문에 궁에서 온갖 괴롭힘을 당하다 누명을 쓰고 처참하게 죽었대. 그래서 그 동생이 군에 들어가 정진했다지. 그가 바로 훗날의 남양후야. 선황은 죽기 직전에 황제놈에게 현비도 들여주었어. 잘 알지 못하는 이 아들에게 부끄럽지는 않은 셈이지.”
“현비는 운이 좋았어. 동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황상이 즉위했으니까. 우리야말로 처참했지! 허선방은 요요를 정말 죽도록 괴롭혔어. 나중에 나와 순비가 들어오자 우리 둘을 죽도록 괴롭혔고. 허선방은 음흉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평소에는 호화롭고 온화하게 꾸미고 다녔지만, 사람을 해치는 수법은 수백 가지가 넘었어. 사람을 말려 죽이고도 어딜 지적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게 잘 감췄지. 황제놈한테 속아놓고 그 자식을 탓하진 못할망정 하필 우리한테 손을 뻗었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사내한테 속았으면서 여인에게 분풀이를 하다니. 어디 아픈 거 아니라니……. 황제놈은 거짓말하는 데 선수야. 순비에게는 무슨 미혼탕(迷魂汤)을 들이부었는지 모르겠다만, 그때 순비는 말끝마다 오라버니(表哥) 타령을 했어. 그 때문에 허선방에게 몇 번이나 벌을 받아도 호칭을 고치지 않았지. 귀신에 홀린 게지! 비교해보면 나는 꽤 똑똑했어. 동궁의 네 여자 중에 셋이 그 자식에게 마음이 있는 걸 알아보자마자 끼어들지 않기로 결정했거든. 내가 누구냐, 난 이 인간 세상에서도 색다른 불꽃이라고! 어떻게 남들이 다 좋아하는 사내를 좋아할 수가 있겠어? 꼭 네 사람을 맞춰야 하는 엽자패 놀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한참을 이야기했지만 순비가 나오지 않아, 나와 온 귀비는 숙비의 구연 능력이 너무 쓰레기 같다고 욕했다. 숙비는 화가 나서 우리에게 해바라기 씨 껍데기를 던졌다. 우리도 되돌려주었다. 그렇게 서로 껍데기를 던지며 소리를 질러 기세를 올려댔다. 우리는 강호의 싸움에라도 참전하듯 호방하게 해바라기 씨 껍데기를 던졌다.
격투는 결국 해바라기 씨 껍데기 비축량이 부족한 숙비가 분수를 모르고 일대 이로 덤빈 탓에 비참하게 패배했다. 그녀는 우리에게 이야기를 계속해 줄 수밖에 없었다.
“순비는 세상천지 자기만 고상한 사람이라 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 동궁에 막 들어왔을 때는 어쨌든 다들 허선방에게 괴롭힘을 당했으니까 난 우리 셋이 같이 놀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 벌을 받아도 서로 보살펴 줄 수 있고! 그래서 요요와 순비를 자주 불러내 변소에 같이 가자고 했는데, 순비는 날 거절하기만 한 게 아니라 내가 촌스럽고 교양이 없다지 뭐야! 바보 아니야? 사람은 다 변소에 가야 하잖아! 뭐가 촌스럽다는 거야? 여자애들끼리 같이 변소에도 안 다니면 우정이 어떻게 생겨!”
“나중에 생각해보니 순비는 황상의 사촌 누이이니, 한 집안사람끼리 똑같이 멍청한 게 정상이더라.”
“순비는 나나 요요보다 더 기개가 있었지. 허선방이 우리를 괴롭혀도 나와 요요는 별말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인 채 괴롭히게 내버려 뒀어. 허선방이 우릴 괴롭히는 건 뒷배가 있기 때문이고, 그 뒷배가 무너지지 않는 한 우린 참을 수밖에 없다고, 반항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냐고 생각했어……. 인화태후가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었으니, 우리가 잘못을 했든 안 했든 다 잘못이 되었지…….”
온 귀비: “그냥 겁쟁이라고 바른대로 말해.”
“겁쟁이? 우리가 겁이 없었으면 황제놈이 즉위할 때까지 버틸 수 있었겠어? 물론 순비는 달랐지. 줄곧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오라버니라는 호칭을 바꾸려고 하질 않더라. 그것도 두 해나!” 숙비는 손가락 두 개를 세워 보였다. “그러다 아이를 둘이나 잃었지. 하나는 허선방이 회임한 걸 알고도 온종일 밤낮으로 무릎을 꿇고 있게 하다가……. 나와 요요는 저를 구하려다 같이 말려들 뻔했는데, 아이를 잃고 나서 우리까지 무시무시하게 원망하더라. 왜 좀 더 일찍 오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난 애를 어떻게 키우면 이렇게 말을 잘할까 궁금했어. 가락이 그렇게 말을 잘하면 난 기쁨에 찬 매질을 할 텐데.”
“삼황자는 황상이 즉위한 지 두 해가 지나고 허가가 몰락한 뒤에야 낳은 아이야. 온원원, 그때는 너도 궁에 있었잖아. 순비가 회임하고도 ‘본 선녀는 너희들과 말하고 싶지 않다’하는 꼬락서니였던 거 기억 안 나?”
온 귀비는 쓰라린 옛일을 떠올리자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걔걔걔걔걔! 나더러 비빈이 되어서 황상을 잘 모시진 못할망정 매일 엉망진창으로 수만 놓는다고 그랬어! 엉망진창이라고! 엉망진창! 빌어먹을 예술적 소양이라곤 없는 작자 같으니! 고상한 취미 하나 없는 주제에 나더러 제 할 일을 안 한다고 그래? 반침(盘针), 투침(套针), 창침(戗针), 수화침(擞和针)을 분간할 수는 있다니? 평수(平绣), 단문수(段纹绣), 타자수(打子绣), 권침수(卷针绣)가 뭔진 아느냐고! 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정색하고 고상한 척만 하면서 하늘로 날아가지도 못하는 게! 다른 거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냐고!”
분노한 온 귀비는 정말 무서웠다. 나는 이불을 껴안고 병아리 쌀 쪼듯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숙비 마마가 깔깔 웃었다. “너희 사이에 그런 일도 있었구나, 푸하하하하하. 알겠으니까 그만 노려봐! 그런데, 나중에 요요의 장안이 죽은 뒤에…… 황상은 삼황자를 요요에게 데려다 키우게 할 마음을 품었어. 순비는 그때부터 매일 아프기 시작했지……. 아휴, 황제놈도 일 망치는 덴 뭐가 있다니까. 머저리 같은 생각을 하고도 제가 똑똑한 줄 알아. 요요가 아이를 잃었으니 비슷한 나이대 어린애를 주면 기뻐할 거라고 여겼는지……. 뭐 이런 등신이 다 있어. 쓸데없이 요요와 순비 사이에 앙금만 남기고 말이야. 요요가 순비의 아이를 원한 것도 아닌데! 아휴, 정말이지 이 남매는 머저리 일가가 따로 없다.”
나는 물었다. “그럼 순비는 궁에서 누구와도 가까이 지내지 않은 거예요?”
숙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도 참 생각이 짧다. 신선에겐 친구가 필요 없어요.”
내가 잘못했습니다. 반성합니다.
온 귀비는 마침내 진정했다. “순비가 누구랑 가까이 지냈는지 정말로 기억이 안 나. 그러고 보니 삼황자도 여섯 살인데, 그 애가 입 열고 이야기하는 걸 들어 본 적 있어?”
“아뇨. 하지만 그게 문제가 있다는 걸 증명하진 않아요. 가락도 다른 사람 앞에서는 말을 잘 안 하잖아요!”
온 귀비: “몰라. 어쨌든 순비는 신기한 정신병자야.”
숙비: “……어, 그런데 현비가 석 달을 매일같이 순비랑 인사하고 매일 자기 옆에 앉히면서 후궁 대가족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기억이 나네.”
“그런 뒤엔요?”
“현비한테 너무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하더라.”
순비는 역시 정신병이 있다! 현비처럼 온 후궁을 통틀어 가장 어질고 따뜻한 사람에게도 욕하다니! 참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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